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하루는 학교 갔다 오니까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집 마당 저쪽으로 데리고 간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자전거가 있는 게 아닌가. “자 이제 너 소원 풀었지. 아빠한테 고맙다고 가서 인사해라.” 뿐만 아니라 나는 “앞으로 엄마 아빠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고 자진해서 서약까지 했다. 일주일 동안 떼쓰고 거의 단식투쟁에 가까운 식사거부 운동을 벌인 소득이었다. 막상 자전거를 갖고 나니 탈 줄 알아야 하는 데 이게 문제다. 쉽게 배워지지 않는 거다. 한 번은 오후에 배우려고 낑낑 대다가 과일가게로 돌진하는 바람에 혼났다. 그래서 새벽으로 연습시간을 바꿨다. 그런데 갑자기 두부 장사 아저씨와 골목길에서 마주 쳤다. “어 어 어”하다 그대로 들이받았다. 덕분에 그 한 주는 매일 반찬이 각종 두부 요리로 도배를 했다. 내 무릎팍 까진 것은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결국 동네 고수에게 배운 비법은 “자전거 잘 탈려면 잘 넘어질 줄 알아야 해. 첫째, 넘어지려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라. 둘째, 앞 브레이크를 너무 세게 잡지 말라. 잘못하면 공중에 붕 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번 몸으로 익힌 것은 잘 잊어 먹지 않는 법이다. 지금도 자전거는 잘 타고 있다. 가끔 넘어져서 탈이지만.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그 때 슬슬 스키 바람이 불었다. 용평 스키장에 가서 우선 강습을 받았다. 10명이 일렬로 줄을 서서 강사의 설명도 듣고, 그리고 엉금 엄금 옆으로 게처럼 걸어서 가는 것도 배웠다. 개인 레슨은 돈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단체강습을 받은 것이다. 조금씩 진전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갑자기 상급자 코스에 올라가면 그 풍경이 어떨까하는 호기심이 발동된 것이다. 일단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정 안 되면 그냥 그 리프트타고 다시 내려 오면 되지’라는 플랜 B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정점에서 리프트가 빙그르 돌면서 그대로 내려 가려는 데 안전요원이 황급히 나를 끌어 내린다. 규칙상 절대 리프트타고 내려갈 수 없단다. 내 눈 앞에 펼치지는 경사도는 스키를 적어도 몇 년 타도 될까 말까할 정도로 가파르다. 겁에 질려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일단 스키를 벗고 걸어서 내려 가기로 했다. 그것도 안된다는 안전요원의 경고를 무시한 채로. 몇 분을 코스 가장자리로 걷고 있는 데, 바로 옆으로 한 70세정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쌩 하고 지나간다. 다시 오기가 발동해서 스키를 신었다. 엄청 자빠지고 구르고 거의 눈사람이 되어서야 밑에까지 내려 올 수 있었다. 스키 고수에게 배운 교훈은 “첫째, 넘어질 때 반드시 뒤로 넘어져라. 둘째, 스키를 발에서 분리시켜라.”이었다. 잘 넘어져야 또 일어 난다.
미국 유학 때의 일이다. 처음 석사학위 받으러 간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데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한국에서 영어 준비도 어느 정도 했는 데도 불구하고. 시험문제에 “I THINK, I BELIEVE, 그리고 I KNOW의 뜻을 구분하라”가 나왔다. 단어는 들어 다 알지만, 그것을 철학적으로 구분하라니. 질문이 너무 뻔하면 기가 막혀서 답이 안 나오는 법이다. 하루는 한국 마켓에 갔다가 그 주인이 자기도 처음에는 공부하러 미국 왔다가 이렇게 장사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등록금을 댈 길이 없어서 주말에 벼룩시장에 가서 조그만 물건을 사고 팔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안되면 돈이 없어서 등록을 못하고, 잘 되면 돈 버는 재미에 공부가 멀어졌다. 이번에는 박사학위 받으러 시카고에 갔다. 도착하자 마자 들은 괴담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에 유학생 한 명이 갑자기 사라졌다. 알고 보니 종합시험에 탈락한 뒤에 그냥 중도하차했다. 한국 최고 대학에서 수석 졸업한 경제학 전공자였다. 어려서부터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시카고에서 받은 충격이 너무 큰 것 같았다. 인생에서 실패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 오히려 치명적 약점이 될 줄이야.
바로 얼마 전 일이다. 내가 애용하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고장났다. 집에서 와이프랑 와인 한 두 잔 할 때도, 또 애들이 집에 와서 같이 맥주 마시면서 파티할 때도 분위기 띄우는 데 아주 좋은 스피커였다. 고장 원인은 배터리 방전이었다. 깜빡 충전해줘야 할 타이밍을 놓친 거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기에 다시 충전을 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보통 7-8시간이면 충전되던 것이 3일이 지나도록 빨간 불만 껌뻑이면서 전혀 충전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인내심이 극에 달해서 그냥 버리려고 했다. 어차피 중고로 싸게 산 물건이다. 이 참에 또 다른 중고 스피커를 살 새로운 기회가 된다. 그런데 와이프가 말린다. “여보 좀 더 두고 봅시다.” 어제 기적같이 그 스피커에 파란 불이 들어 왔다. 다시 작동을 잘 한다. 새 중고를 살 기회가 날라 갔다. 그래서 얻은 교훈 “첫째, 방전은 함부로 시켜서는 안된다. 둘째,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 셋째, 기회는 또 온다.”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온 세상이 끝장 날 것만 같다. 그러나 ‘비 오는 날에도 해는 하늘에 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살다 보면 안 넘어질 수 없다. 안 넘어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넘어질 때 안 다치게 넘어지는 법을 배워라. 넘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고, 뒤로 자빠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본능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게 잘 넘어지는 방법이라면 머리로 배우고 몸으로 익혀야 한다. 빨간 불을 꾹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파란 불이 들어 온다.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버티자. 어차피 인생이란 비즈니스는 버티기 게임이 아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