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12일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사진=연합뉴스
노태우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정원식(사진) 전 국무총리가 12일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정 전 총리는 한국 보수 진영의 원로로, 대학교수로 출발해 교육행정 수장을 거쳐 행정부 2인자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지난 1995년 보수 진영을 대표해 출마한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에서 큰 표 차이로 지며 짧은 정치 역정을 마감했다. 그는 최근까지 다른 보수 원로들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강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 전 총리는 일제 강점기 황해도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스무 살 나이로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6·25전쟁이 터지자 국군에서 장교로 복무한 뒤 1957년 미국으로 유학, 교육심리학을 전공했다. 1961년 모교인 서울대 사범대 조교수로 임용되며 학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교단에서 강의를 하며 틈틈이 신문에 쓴 칼럼을 묶어 펴낸 책 ‘인간과 교육’이 1980년대에 100만권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당시 교수로 활동하던 정 전 총리는 민주화 이후인 지난 1988년 노태우 정부에 의해 문교부(현 교육부) 장관에 임명됐다. 당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창립되고 정부가 이를 불법단체로 규정하며 교육 현장이 뒤숭숭하던 때였다. 고인은 1989년 5월 문교장관으로서 전교조 사태에 엄중히 대처하며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해직 등 불이익과 일부 주동자의 구속 등 강경책을 밀어붙였다.
문교장관을 그만두고 몇몇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던 고인은 1991년 5월 노태우정부에 의해 다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총리 취임을 앞두고 그해 6월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에 고별 강의를 하러 간 고인은 “전교조 선생님들을 살려내라” 등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들한테 포위돼 무려 20분간 계란과 페인트, 밀가루 세례를 받으며 구타까지 봉변을 당했다.
고인은 지난 1992년 10월까지 총리로 재직하며 남북총리회담의 남측 대표를 맡아 북측 인사들과 만나는 등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서울대 동문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고인은 YS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1992년 선대위원장을 지냈다. 또 이에 따른 보답으로 지난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본격화 이후 첫 시도지사 선거 때 YS가 고인을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밀었다. 당시 민선 서울시장을 노리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의 일방적 공천 강행에 불복, 고인과 경선을 했다가 패배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고인은 비록 여당 후보였지만 야당의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물론 무소속 후보인 박찬종 전 의원에게도 밀려 3위에 머물렀다. 이 선거 이후 고인은 이후 현실 정치와는 다소 거리를 두는 삶을 살아왔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것을 제외하면 대외활동도 뜸했다.
고인이 가장 최근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18년 5월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가 역대 총리들을 삼청동 총리관저로 초청, 오찬을 함께했을 때였다. 고인은 2018년 10월에는 이인호 전 주러시아 대사,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같은 보수 진영 원로들과 함께 ‘문재인 퇴진과 국가수호를 위한 320인 지식인 선언’에 동참하는 등 문재인정부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정 전 총리의 빈소는 이날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김상용기자 kim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