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休] 붉은노을·초록마을·노란유채…봄, 평범한 날의 수채화

■광양 백운산 옥룡계곡
계곡 따라 오르면 검푸른 동백숲
빼곡했던 붉은자태 어느새 흔적만
봉강저수지 옆에는 초록기운공원
만발한 유채꽃 사이로 붉은 노을
당연했던 '일상의 소중함' 깨우쳐

광양 봉강저수지 초록기운공원. 유채꽃밭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다.

광양의 풍광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백운산이다. 물론 바다나 제철소도 광양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콘텐츠들이지만 백운산이 없으면 광양은 있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광양시의 전체 면적 456㎢ 가운데 백운산이 뻗어 있는 넓이가 240㎢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운산의 해발 고도는 1,222m로 바다에 면접한 산답지 않게 우람차고 높아서 이곳에 오르면 찬란한 바다와 인간이 일궈놓은 제철소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광양에 진입한 기자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백운산 옥룡계곡이었다.

원래 이름은 동곡계곡이지만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옥룡계곡이다. 이유는 백운산 곳곳에 자취를 남긴 도선국사의 호가 ‘옥룡’이기 때문이다. 옥룡계곡을 따라 오르면 초입을 지나 검푸른 동백숲이 나타난다. 이 숲은 너무 짙어서 뒤편 백운산의 겨우 신록이 돋아나는 나무들의 스산함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광양을 뒤덮었던 벚꽃은 이미 꽃잎을 떨궜지만 동백꽃은 마지막 붉은 자태를 드문드문 남겨둔 상태다.


동백숲에 둘러싸인 빈 절터인 옥룡사지는 신라 경문왕4년(864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 옥룡사가 있던 자리다. 지난 1994~1999년 순천대학교박물관이 4차례 조사를 실시해 부도와 탑비가 있던 탑비전(塔碑殿)에서 2채의 건물터를 발굴했는데,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도선의 부도전에서 출토된 석관이다. 8각 바닥돌 아래에서 길이 95㎝, 너비 54㎝, 높이 48㎝인 돌로 만든 관이 출토됐는데 관 안에서 인골이 물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조사단은 유골의 주인을 밝혀내기 위해 뼈를 미국으로 보냈지만 물속에 장기간 잠겨 있던 까닭에 탄소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검사가 불가능했다. 1997년 당시 발굴현장에 있던 국내 전문가들은 유골 주인의 신장이 169㎝, 치아의 뿌리가 3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 당시 나이는 60세, 성별은 남성으로 추정했다. 인골은 두개골에서 척추와 골반까지 원형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도선국사의 것으로 보이는 유해는 화장을 하지 않고 육탈을 한 시신에서 뼈를 모아 관에 보관한 세골장(洗骨葬) 형식으로 발굴됐다.

역사적 사실이 수수께끼로 봉인된 옥룡사지를 나서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백운산휴양림이다. 하지만 휴양림은 방역지침에 따라 봉쇄됐고 이 기간 수리보수를 하는 까닭에 통제되고 있어 대신 성불계곡을 거쳐 성불사로 향했다. 성불사는 주차장에서 2㎞에 이르는 계곡이 절경으로 여름이면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하지만 기자가 찾았을 때에는 봄 가뭄에 지친 물줄기가 가늘어져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백운산 도솔봉 아래 위치한 성불사 역시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60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해 지금의 대웅전과 관음전, 극락전, 사천왕문을 겸한 범종각, 일주문,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오층석탑을 복원해 놓았다.

이 봄, 백운산을 내려와 광양시로 진입하기 전에 봉강저수지 근처를 지나게 된다면 오른쪽 초록기운공원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만발한 유채꽃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이 절경이다. 이 정도 풍경이라면 우연을 기대하지 말고 때맞춰 찾아가 여유로운 봄날 저녁을 완상해볼 만도 하다.

김시식지(始殖地)는 한자로 알 수 있듯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김을 인공 양식한 것을 기념, 조성해 놓은 전시관이다.

광양에 왔다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있는데 바로 김 시식지(始殖地)다. 김 시식지는 한자로 알 수 있듯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김을 인공 양식한 곳이다. 김 양식을 시작한 사람의 이름은 김여익(1606~1660)으로 인조18년(1640년) 당시에는 채취에 의존해 생산하던 김을 광양만 바닷물과 섬진강물이 합수하던 태인도에서 양식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사실은 광양 현감 허식이 김여익의 증손자인 김시봉에게 1714년 써 준 묘표문에 ‘시식해의(始殖海衣·김양식을 시작했다)’라는 문구가 있어 기록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김’이라는 이름도 김이 이웃 고을 하동장에서 판매될 때 ‘광양에 사는 김씨가 생산한 음식’이라는 뜻으로 붙여졌던 것이라니 그저 재미있고 신기할 따름이다. 김 시식지에는 역사관이 있어 광양에서 성행하던 김 양식의 이야기를 정리해 전시하고 있다. /글·사진(광양)=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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