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자가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 당할 정도로 홀대 받지만 결국 세상을 바꾼 아이디어를 ‘룬샷’이라고 한다./사진출처=픽사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신형 잠수함 유보트는 침묵의 사냥꾼이었다. 무리 지어 북대서양을 건너던 선단 한가운데 불쑥 떠올라 망망대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연합군이 유보트에 잃은 배가 1939년 75만 톤에서 1941년에는 430만 톤으로 급증했다. 연합군이 매달 건조할 수 있는 배보다 더 많은 배를 유보트가 침몰시켰다. 1942년에는 피해 규모가 780만 톤으로 커졌다. 이대로 가면 독일이 승기를 잡는 게 자명했다. 하지만 1943년 3월 대서양 상공에 등장한 미국의 신형 폭격기가 전세를 뒤집었다. 마이크로파 레이더와 무선항법 장치를 탑재한 ‘B-24 리버레이터’였다. 유보트는 사냥꾼에서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미국 물리학자 출신의 기업가인 사피 바칼은 유럽을 구원하고 미국을 오늘날 패권국으로 만든 폭격기의 탐지·정찰 기술이 ‘룬샷(LOONSHOT)’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룬샷’을 ‘제안자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다들 무시하고 홀대하는 아이디어이나 결국은 세상을 바꾼 프로젝트’로 정의한다.
미국 엔지니어들이 우연히 알아낸 레이더 탐지 기술은 초기엔 모두에게 무시 당했다. 터무니없다는 이유에서다. 자칫 폐기될 뻔한 ‘룬샷’의 가치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키워낸 과학 행정가 버니바 부시가 없었다면 온 세상이 히틀러에게 짓밟혔을 수도 있다.
1940년대 미국의 공학자이자 행정가였던 버니바 부시. 홀대 받던 과학 프로젝트와 국가의 적극적 지원은 연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잘 키운 룬샷이 세상을 바꾼다
‘룬샷’의 배양자 부시는 2차 대전 승리를 이끌어낸 전쟁 기술 개발에 그치지 않고, 미국 정부로부터 ‘괴상한 아이디어’를 적극 독려하는 기초과학 장려 정책도 이끌어냈다. 그가 뿌린 씨앗은 GPS, 개인용 컴퓨터, 바이오산업, 인터넷, 심박조율기, 인공심장, MRI, 검색 알고리즘 등의 탄생을 이끌었고 오늘날 과학 강국 미국이라는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룬샷을 잘 알아보고 키워내는 일은 국가 뿐 아닐 기업의 운명도 좌우한다. 룬샷을 잘 키워내면 혁신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지만 반대로 이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소홀히 하면 쇠락의 길로 향하게 된다. 저자는 책에서 ‘잘 나가다 바보가 된’ 기업 사례로 노키아, 머크, 디즈니를 꼽는다. 대박을 낸 후 더이상 룬샷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노키아의 경우 애초 고무장갑과 화장지를 팔다가 ‘이동 전화를 만들겠다’는 룬샷에 주목한 덕에 2000년대 초반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공룡 기업이 된 이후 휴대 전화에 ‘온라인 앱스토어’를 탑재하자는 사내 룬샷을 무시했고, 3년 후 같은 아이디어를 제품화한 애플에 완전히 밀려버리는 신세가 된다.
버니바 부시가 육성한 전쟁 기술,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선보인 아이폰과 앱 스토어, 심장질환 사망률을 극적으로 떨어뜨린 엔도 아키라의 청록색 곰팡이 등은 성공한 룬샷의 전형이다.
하지만 저자는 리더가 룬샷을 잘 키워내는 것 만으로 국가나 기업, 조직이 잘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부시가 괴상한 것을 탐구하는 과학자와 탄약을 조립하는 병사들 사이의 균형과 소통을 중요시 했듯이, 조직 구조를 잘 관리해 나가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이디어를 내는 룬샷 그룹과 그들의 아이디어를 현장에서 업데이트해 나가는 프랜차이즈 그룹을 잘 분리해서 끌어가고, 동시에 이들 간의 소통과 균형을 이뤄 내는 일이야말로 리더의 핵심 역할이라는 게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래야만 창의성과 효율성이 선순환하면서 우상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룬샤’의 저자 사피 바칼./사진제공=흐름출판
■상전이·상분리…과학용어로 성공방식 설명
물리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이 같은 주장을 과학 원리에 비교해 설명해 나간다. 먼저 룬샷이 세상의 판도를 바꾸는 상황을 상전이(phase transition)에 빗댄다. 상전이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물질의 상(相)이 바뀌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0℃를 기준으로 같은 물질이 물과 얼음으로 갑자기 뒤바뀌는 게 대표적이다. 또 룬샷 그룹과 프랜차이즈 그룹의 분리와 공존은 ‘상분리(phase separation)’, 양자의 균형은 ‘동적평형’이라는 과학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편 저자는 한국어판을 내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는 자신의 책이 더 깊은 울림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한국이 6·25전쟁 후 단기간에 가난한 농업국에서 강력한 공업 국가로 발돋움했다는 점에서다. 과학과 기술, 수학의 역할을 유독 강조하는 나라라는 점도 저자가 한국으로부터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는 이유다. 1만8,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