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有備無患).’
박원주(56·사진) 특허청장 하면 딱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다. 박 청장이 지난 2009년부터 일본에 근무할 때 두 가지 ‘격변’을 겪었다. 하나는 글로벌 금융위기이고 또 하나는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이다. 특히 일본 대지진 때는 난리를 겪었다. 교통이 두절되고 생수 공급도 안 되는, 평시에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 닥친 것이다. 이때부터 박 청장은 “큰일이 벌어지면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26일 1시간30분 넘게 진행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박 청장은 “위기상황은 일상적으로 겪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준비를 해놓는다고 해도 (실제 일을 겪게 되면) 부족한 게 많다”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을 대비해놓는 게 큰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박 청장은 2년 전 취임한 때부터 지금까지 제1의 유비무환 과제로 지식재산(IP) 보호를 강조해오고 있다. 특허나 상표·디자인·영업비밀 등을 모두 포괄하는 지식재산은 전 세계가 기술패권을 다투는 상황에서 놓쳐서는 안 될 핵심 ‘무기’여서다. /대담=김홍길 성장기업부장 what@sedaily.com
박 청장은 국내 지식재산에 대한 보호를 지금처럼 해오던 대로만 하면 안 된다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2000년대 세계 최고 수준이던 국내 액정표시장치(LCD) 산업이 2011년 중국에 LCD 특허 출원량에서 처음으로 추월당했다. 그때만 해도 산업 경쟁력은 한국이 더 있다며 자조를 했지만 곧이어 2017년에는 LCD 산업 전체를 중국에 내줬다. 국내 업체들은 LCD를 버리고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빠르게 전환했지만 “이마저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라는 게 박 청장의 설명이다.
박 청장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 1위를 하던 산업에서 관련 특허 출원량을 추월당하면 5~7년 뒤면 1위 자리를 내주게 된다”며 “이는 일정한 패턴”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OLED 분야에서 아직 우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특허 출원량은 중국에 밀리고 있기 때문에 ‘OLED 패권’도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박 청장이 업계 사람들을 만나 물어봐도 “1위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고 한다. 박 청장은 “다행히 퀀텀닷 디스플레이나 마이크로발광다이오드의 생산사슬(밸류체인)에 빈틈이 보여 이 부분을 파고들면 승산이 있을 것 같다”며 “업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적극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청장은 “중국 등 외국에 특허 출원(량)을 역전당한 산업은 머지않아 주도권까지 잃게 된다”며 “지식재산을 스스로 만들고 보호하지 않는 기업은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특허 등 지식재산의 주도권을 놓치는 순간 글로벌 생산사슬에서 ‘미아’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이 같은 경고를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특허 출원량 세계 4위로 지식재산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식재산을 제대로 관리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은 낙후돼 있다. 지식재산을 제값을 주고 사려는 기업도, 지식재산을 잘 관리해 제값을 받으려는 기업도 없다 보니 외형만 기형적으로 커지고 실속은 없는 상황이 지속돼온 것이다. 더구나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식재산 훔치기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암암리에 탈·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맹점을 보이는 것은 정책과 시장이 엇박자를 내며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청장은 ‘지식재산의 가치를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게 하면 처벌 등의 규제가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보호가 이뤄질 것’이라는 지론을 폈다. 남의 지식재산을 훔쳐 얻은 이익이 나중에 물어줘야 할 금액보다 많으면 아무리 처벌이나 규제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처음 도입을 했을 때도 처벌을 위한 게 진짜 목적이 아니라 지식재산에 대한 적정한 가격을 매기고 이를 거래하는 시장 형성을 유도하려고 했던 것”이라며 “지식재산 거래량이 쌓이면 쌓일수록 (해당 지식재산에 대한) 적정한 가격이 형성되고 평가자가 늘어나면서 지식재산을 사고파는 질서도 잡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지식재산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리는 IP금융도 지금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고 박 청장은 자신했다. 특허청은 앞서 지식재산 보호를 위해 지난해 7월 고의적 특허 침해에 대해서는 3배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앞장서 도입·시행했다. 박 청장은 “정부가 무리하게 개입하지도 않고 (IP금융 등의) 혁신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임기 마지막까지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지식재산을 잘못 관리하고 보호하다 보면 나중에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부메랑이 될 수 있는데도 중소기업과 스타트업들의 위기의식은 낮은 편이다. 아이디어 하나로 성패가 결정되는 스타트업도 이 아이디어를 자신의 권리로 확고하게 만들어놓은 곳이 드물다는 것이다. 박 청장은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들은 특허 등 지식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비용으로만 생각한다”며 “특허의 가치를 결정하는 변리사 비용도 아끼려 하다 보니 (지식재산) 권리 보호가 느슨한 부실특허가 만연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청장은 1998년 등장했던 인포뱅크의 ‘단문메시지 통합 서비스’를 사례로 들었다. 가끔 TV나 라디오에서 ‘정답을 아시는 분은 우물정(#)과 XXXX(전화번호)를 눌러 (방송사로) 보내주세요’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이 서비스를 가능하게 한 게 인포뱅크다. 문제는 인포뱅크가 이 서비스에 대해 국내특허만 출원했다는 것이다. 전 세계 단문메시지 서비스 시장은 연간 3조원 규모로 성장했는데 인포뱅크가 당시 해외특허 출원만 해놓았어도 매년 최소 1,000억원을 앉아서 벌어들일 수 있었는데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박 청장은 “(인포뱅크) 서비스의 파급효과를 고려하면 지금까지 놓쳐버린 이익이 1조원은 될 것”이라며 “앞으로는 지식재산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벤처기업이 개발한 MP3플레이어 역시 세계 최초 개발이라는 타이틀을 갖고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해외 기업의 배만 불리는 안타까운 사례다. 박 청장은 “당시 MP3플레이어를 개발하고 특허를 낸 국내 업체가 있었는데도 (특허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며 “결국 이 기술은 미국의 특허관리회사로 넘어가 지금은 천문학적인 로열티를 놓치게 됐다”고 지적했다. 지식재산 보호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활용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과의 격차는 앞으로 더욱더 커질 것이라는 게 박 청장의 주장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특허를 보유한 스타트업이 특허가 없는 스타트업보다 성공할 확률이 약 35배 높다는 통계가 있다”며 “국내에도 지식재산 경영에 나선 기업들이 많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기업에 ‘지식재산이 중요하다’고 외치기만 하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박 청장은 특허청 인력을 동원해 기업들의 지식재산 연구개발(R&D)을 돕고 있다. 지식재산 R&D는 기업이 특허를 낼 수 있는 분야를 특허청이 찍어주거나 기업이 보유한 특허를 촘촘하게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박원주 특허청장(오른쪽 두번째)과 정종선(˝ 세번째) 신테카바이오 대표가 21일 대전 유성구 소재 신테카바이오 본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연구개발 기업의 애로사항과 지원방안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신테카바이오는 인공지능 기술로 코로나19 신약에 이용할 수 있는 약물을 도출하는 벤처기업이다. /사진제공=특허청
실제 한 제약 업체는 특허청의 지원 덕에 죽어가던 특허를 살려 기사회생했다. 임상실험을 전문으로 하던 한 제약 업체는 간섬유화 개선물질에 대해 특허를 얻었지만 곧바로 낙심했다. 이 기술을 적용해 약을 만들어도 수요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간섬유화는 간 질환의 마지막 단계여서 약물치료보다 간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약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낮았던 것이다. 특허청은 이 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화학과 약재·법률 분야 전문가를 모두 동원해 이 회사의 특허물질을 다른 데 활용할 수 없는지 연구했다. 그 결과 의도치 않게 다이어트에 효능이 있다는 결과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박 청장은 “지식재산 연구개발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 대표적인 사례”라며 “망할 뻔한 제악 업체를 살려내는 데 특허청이 작은 도움이 됐다는 게 기쁘다”고 말했다. 이후 “특허청이 기업과 국가산업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소통을 활발하게 해야 한다”는 박 청장의 소신은 더 확고해지고 있다.
이 같은 박 청장의 생각은 기존 특허청의 기능에 대해 ‘재해석’하는 차원의 변화를 몰고 왔다.
지금까지 특허청은 특허 등의 심사를 더 빨리, 정확하게 하려는 데만 몰두해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관료스러움’의 대표적인 부처로 특허청이 손꼽혔던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박 청장이 “특허청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나가야 하고 특허심사 기능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 청장이 이처럼 부지런을 떨다 보니 ‘특허청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책 변화의 폭도 커지고 있다. 빅데이터를 특허정보 분석에 도입해 산업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찾아오자 방역·검역·치료 기술을 찾기 위해 빅데이터를 돌려 관련 특허를 족집게처럼 찾아내 민관과 긴밀한 협업이 가능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박 청장은 올해 지식재산 거래시장을 의미하는 IP시장 활성화에 올인하기로 했다. 앞서 특허청은 올해 초 ‘IP회수지원기구’를 만들었다. 지식재산담보대출이 부실이 날 경우 이 기구가 떠안는 구조여서 은행이 안심하고 지식재산담보대출을 늘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400억원 규모의 모태펀드를 지원하고 기관 등의 투자자들이 쉽게 투자할 수 있도록 지식재산 투자 관련 금융상품도 다양하게 출시하기로 했다. 박 청장은 “기술 애널리스트들이 기업들이 보유한 혁신적 기술에 대해 분석과 평가를 자유자재로 하고 투자자들이 관련 기술에 투자하는 선순환을 이뤄 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 청장의 이런 변화의 노력은 국내 기업들이 앞으로 더 치열해질 글로벌 기술패권 전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송곳 같은 ‘무기’를 갖추게 하는 ‘21세기 징비록’의 발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리=양종곤기자 ggm11@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박원주 특허청장
He is···
△1964년 전남 영암 △198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90년 서울대 정책학 석사 △1997년 미국 인디애나대 경제학 박사 △2007년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2009년 주(駐)일본대사관 공사참사관 △2012년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실 산업경제정책관 △2013년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정책실 산업정책관 △2014년 산업부 대변인 △2015년 산업부 기획조정실장 △2016년 산업부 산업정책실장 △2016년 대통령비서실 산업통상자원비서관 △2017년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 △2018년 9월~ 제26대 특허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