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영국 런던에서 뜻밖의 낭보가 도착했다. 국제회계기준(IFRS)의 제·개정을 담당하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오는 2022년 도입 예정이던 새 국제보험회계기준(IFRS17) 도입 시기를 1년 늦춘 2023년으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손꼽아 기다리던 결정이었는데도 보험업계에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만 껐을 뿐”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보험업계가 수십조원에 달하는 자본확충 부담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IFRS17은 보험회사가 회계장부 작성 시 지켜야 할 새 기준이다. IFRS17의 핵심은 고객에게 돌려줄 보험금을 의미하는 보험 부채를 원가 방식에서 시가평가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시가평가 방식에서는 과거 판매한 고금리 계약의 부채를 계산할 때도 현재의 낮아진 금리를 적용해야 하다 보니 부채 규모는 커지고 이에 대비해 쌓아야 할 책임준비금도 덩달아 커진다. 보험사의 재정 상태와 수익성을 보다 투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글로벌 보험사들과 회계기준을 통일해 대외 신인도가 높아지는 점은 분명 장점이다. 문제는 방식과 속도다.
NICE신용평가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기준금리가 1.50%(국고채 금리 2.4%)일 때 보험사들이 IFRS17에 대비해 추가 적립해야 하는 보험부채 규모는 약 74조원이며, 이 중 삼성·한화·교보생명 등 대형 3사의 자본확충 부담은 56조원에 달한다. 현재 기준금리는 이보다 0.75%포인트 낮다. 쌓아야 할 자본 부담이 더 커졌다는 얘기다.
IFRS는 기업회계의 패러다임은 물론 경영전략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도입 결정부터 준비까지 업계의 의견 수렴이 필요했지만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에 몰두하던 이명박 정부 시절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다는 미명하에 수정 없는 ‘전면 도입(full adoption)’을 결정했다. 반면 유럽·호주 등을 제외한 미국·일본 등 상당수 국가는 IFRS17을 도입하지 않기로 했고 자국 회계방식을 고수하는 중국은 IFRS17을 도입할지 시간을 두고 판단하기로 했다.
저금리에도 ‘전면 도입’ 입장을 강행하는 정부에 업계는 IFRS17 도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주장했지만 금융당국은 “국제 신뢰 때문에 연기나 유예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2016년 IFRS17의 핵심 내용이 확정되면서 보험업계는 지난 3~4년간 회계 충격을 줄이기 위한 단계적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새 회계기준에서는 더 이상 수익으로 인식되지 않는 저축성보험 비중을 줄이는 대신 보장성보험과 변액보험 비중을 늘렸고 자본확충에 적극 나섰다. 보험업 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기준(RBC)을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며 IFRS17에 맞춰 시행될 새 건전성 기준인 신 지급여력제도(K-ICS·킥스)와 부채적정성평가(LAT)에도 대비했다. 그러나 고령화·저성장으로 보험업 침체가 이어지며 보험사들은 충분한 자본확충에 나서지 못했고 저금리 장기화가 이어지며 노력의 결실마저 더디게 나타났다. 급기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앞당겨진 제로금리 진입으로 비교적 준비 속도가 빠르다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생명·교보생명·신한생명 등도 안심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10년물 국채 수익률 2%대 안팎에서 진행한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인 킥스 1·2차 계량영향평가 자체가 무용지물이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한 생보사 임원은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 2년 뒤에 예정돼 있던 대입 수학능력시험을 1년 늦춰준다 한들 3년 내에 시험을 치를 학업능력을 갖출 수 있겠느냐”며 “회계 선진화와 건전성 기준 강화도 중요하지만 속도 조절 없는 규제 강화에만 매몰됐다 감독할 보험사가 사라지면 감독 당국은 누굴 감독해야 하느냐”고 꼬집었다.
업계가 드는 모범사례는 대만이다. 대만 정책 당국은 IASB가 정하는 IFRS17 도입 스케줄을 존중하되 IASB가 공표한 시행 시기로부터 3년 후 도입하는 것으로 스케줄을 짰다. 이는 대만 보험업계가 금리 하락에 따른 보험부채 증가 규모와 민감도를 분석한 자료를 제출하며 시행시기를 연기해 준비기간을 최대한 확보할 것을 건의한 데 따른 것으로 유럽 등 주요국의 IFRS17 도입 후 문제점을 참고하며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미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대만 보험사들은 일본과 미국의 보험법규를 참고한다는 점에서 한국과 유사한데 같은 이유로 대만은 유럽과 상품이나 법규의 실정이 다른 만큼 IFRS17의 전면 도입에 신중한 입장”이라며 “실제로 IFRS 표준안을 1단계 도입하면서 대만 당국은 IFRS 원문에서 일부 옵션을 제거하고 일정을 조정하는 식으로 업계 충격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절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IFRS17 도입 시기를 늦추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지금이라도 정부와 업계가 실현 가능한 로드맵을 만들어 보험업의 선진화와 글로벌 표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성주호 경희대 경영대학 교수는 “이번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가 아니더라도 우리 경제는 성장동력에 대한 우려, 심각한 청년실업 문제, 자영업의 불안정성 등 경제 전반의 불안 요소로 인해 저금리 기조의 고착화 또는 더 나아가 마이너스 금리시대를 완전 배제할 수 없다”며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현시점이야말로 IFRS 17 도입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적기”라고 주장했다. 한국회계학회 보험회계분과위원을 맡고 있는 박성종 안양대 교수도 “보험사의 드러나지 않았던 부채를 모든 사람이 투명하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IFRS17 도입이 방향성은 맞지만 돌발변수가 계속 생기는 상황에서 우리와 규모가 비슷한 나라들도 근본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보험산업의 건전성도 중요하지만 부실기업을 솎아내는 작업을 지금 했을 때 시장이 견딜 수 있는지 보험소비자 입장에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