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 "당차고 주체적인 사랑...청춘 공감할 '2020 춘향' 그렸죠"

■국립창극단 신작 ‘춘향’ 극본·연출 김명곤 인터뷰
"지고지순 순애보는 봉건적 여인상
따질 것은 따져 묻는 춘향으로
인물·이야기 구조 현대적 재해석
창극의 본질인 '소리'에도 집중"
98년 이어 재회작도 '춘향' 인연

국립창극단 신작이자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 공연 ‘춘향’의 극본·연출을 맡은 배우 김명곤/권욱기자

과거보러 떠난다는 정인(情人) 앞에서 눈물만 훔치던 그 여인 춘향은 잊어 주시라. ‘무슨 소리냐’며 당당히 따져 묻고, 계약 같은 사랑은 하지 않겠노라며 혼인 증서를 박박 찢는 당찬 여성 춘향이가 진한 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작이자 국립창극단의 신작 ‘춘향’을 통해서다. 이토록 멋진 여자 춘향을 빚어낸 이는 배우로서 다양한 소리 작업에도 참여해 온 김명곤이다. 국립극장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가 신작 ‘춘향’의 극본·연출을 맡아 극장의 70세 생일을 빛낼 예정이다.

“요즘 청춘 남녀들도 ‘나도 저런 적 있는데’ 하고 공감할 이야기가 될 겁니다.” 최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만난 김명곤은 이번 작품의 중요한 축으로 ‘공감’을 꼽았다. 지고지순한 정절의 표상은 더는 관객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요즘 저런 사람이 어딨어’가 아닌 ‘나도 저런 적이 있는데’라는 감탄을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목표로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연락 없는 남자를 제 목숨 던져가며 기다리는 정절의 화신은 봉건사회 남성들이 원하던 여인상”이라며 “전통 춘향전의 이야기 구조나 인물 해석을 현대적으로 돌이켜 분석하면 사실 맹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납득 안 되는’ 장면들을 크게 손봤다. 대표적인 것이 몽룡이 써주는 혼인 증서다. 몽룡은 춘향과 첫날밤을 보내기 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혼인 증서를 춘향의 모친 월매에게 써주고, 월매는 이를 딸에게 건네며 ‘우리 목숨이 달렸으니 잘 간직하라’고 당부한다. 김명곤의 춘향은 이렇게 건네받은 목숨줄을 몽룡 앞에서 보란 듯 찢어버린다. “혼인 증서라는 것이 과거 높은 신분의 남자가 낮은 신분의 여자를 계약서를 주고 산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죠. 춘향은 ‘네가 한 남자로서 나를 사랑하면 나도 한 여자로서 너를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계약 관계를 거부합니다. 사랑도 적극적으로, 또 주도적으로 개척하는 인물을 보여줄 겁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둘러싼 이야기도 크게 손봤다. 몽룡은 서울로 떠나 몇 년 동안 편지 한 장 없고, 그 사이 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며 고초를 겪는다. 이 일방적인 순애보도 사실 2020년을 사는 관객에게 공감을 사기는 어렵다. 김명곤은 이 ‘핵 고구마(매우 답답한) 설정’을 ‘시간의 압축’으로 바꿨다. 그는 “(편지 한 장 없는 몽룡이) 사실 나쁜 놈이고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두 사람이 5월 단오에 만나 그해 가을 재회하는 것으로 시간을 과감하게 줄였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도창(導唱·극의 전개를 창으로 해설)을 없애고 음악과 연출로 설명을 대신하는 시도도 이뤄진다.

국립창극단 신작이자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 공연 ‘춘향’의 극본·연출을 맡은 배우 김명곤/권욱기자

신작 무대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바로 창극의 본질, 소리다. 그간 창극 공연은 대중과의 접점을 모색하느라 소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틀’에 무게를 실었다는 게 김명곤의 생각이다. 그는 “옛날엔 ‘귀 명창’이라고 하는, 판소리를 제대로 듣는 관객들이 많았다”며 “‘어떤 소재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아닌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에 무게를 두겠다”고 강조했다. 작창을 맡은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만정제 춘향가를 완성한 만정 김소희의 제자이자 국가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로, 그 어느 때보다 본연의 깊은 소리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여러모로 의미 깊은 춘향과의 만남이다. 김명곤은 1998년 국립창극단의 완판장막창극 ‘춘향전’ 대본을 썼다. 20여 년 만에 국립창극단과 ‘같은 듯 다른 춘향’으로 재회한 인연이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는 명장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각본을 쓰기도 했다. 새로운 춘향이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작업들이 쌓여 가능했다. 세 번째 춘향과 만나 작업한 그는 관객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어려운 한자 말이나 일부 시대와 맞지 않은 설정은 손 봤지만, 춘향가의 음악적 깊이는 훼손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귀를 활짝 열고 ‘2020 춘향’을 맞이해주세요.” 14~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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