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류허 중국 부총리가 부총리가 지난 1월15일(현지시간) 백악관 집무실에서 미중 1단계 무역합의안에 서명한 후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DC=AP연합뉴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6일 “코로나19 사태로 미국과 중국의 상호 의존도가 줄어드는 디커플링이 심화할 것”이라며 “G2 탈동조화로 ‘내 편에 줄 서라’는 압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권욱기자
전염병의 창궐은 예로부터 국제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변곡점이 됐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농업 인구를 감소시켜 중세 봉건제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고, 잉카·아즈텍 문명은 16세기 스페인 정복자와 함께 상륙한 천연두로 막을 내렸다. 지금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세계를 코로나 이전(BC)과 코로나 이후(AC)로 나눌 것이라고 한다. 각국마다 국경을 잠그고 폐쇄적 국가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모습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1년여의 무역전쟁 끝에 불안한 휴전을 맞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코로나19 창궐 이후 갈등의 골이 다시 깊어지고 있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병광 책임연구위원을 6일 만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질서와 미중 패권전쟁 양상 등에 대해 들어봤다.
-미국은 코로나19 발원지인 중국의 책임론을 잇따라 거론하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도 시사했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 배경은 뭔가.
△지난해 무역전쟁은 미중 패권전쟁의 서막일 뿐이다. 미국은 무역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의 패권 도전을 좌절시키기 위해 압박을 지속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기회였다. 연말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미국의 초기 방역 실패의 책임 전가 내지 희생양 삼기 측면도 있다. 중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한 심리전·여론전은 패권전쟁의 새로운 양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사태의 중국책임론을 다시 꺼내면서 손해배상 청구를 시사했다. /워싱턴DC=AP연합뉴스
-중국책임론은 나름 설득력이 있는 주장일 수 있는데.
△그렇다. 코로나19 사태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다. 발원지를 부정할 수 없다. 중국은 발병 사실을 빨리 알려 국제사회에 충분히 경고했어야 했다. 중국이 미적대면서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은 2003년 사스 확산 때도 은폐 시도를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국제공조가 잘 이뤄진 것에 비해 이번에 안 되는 이유는.
△과거 위기 때는 미중 간 힘의 격차가 컸고 패권국인 미국이 발원지였다. 미국은 뭔가 양보해야 할 처지였다. 그 틈을 중국이 파고들었다. 주요2개국(G2) 체제는 그때부터다.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국제적 협력 없이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윈윈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뭘 의미하나.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미중 간 불신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양국 모두 리더십에 타격을 입어 대내외적으로 탈출구가 필요하다. 양국은 앞으로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안보 외에도 경제·과학기술 분야와 국제협력 체계에서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문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패권전쟁은 서로 위험을 회피하자는 ‘탈동조화(decoupling·디커플링)’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미중 관계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상호 의존적이었다. 불신 속 협력 관계를 유지했고 경쟁과 협력이 공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미중 패권전쟁의 양상은 과거 생존을 위해 다퉜던 미국과 소련의 진영 대결구도처럼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미소 진영 대결구도와 같은 양상의 의미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진영의 대결이었다. 경제적 의존도가 낮고 교류도 미미했다. 미중 패권전쟁이 미소 진영 대결구도로 전환한다는 것은 상호 공존 부재, 협력 부재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지구촌의 재앙을 주도적으로 해결할 슈퍼파워(강대국)가 존재하지 않는 ‘G제로’ 시대가 현실화해 양측이 서로 여러 나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가안보 보고서에서 중국을 ‘수정주의자’ ‘경쟁자’로 간주했다. 이는 냉전 시절 상대국을 ‘적국’으로 보는 개념과 다를 바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22일 중국 산시성 시안에 위치한 산시자동차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산시자동차 공장은 최근 조업을 재개했다. /시안=신화연합뉴스
-흔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질서 화두로 탈세계화를 꼽는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부터 흔들렸던 세계화 후퇴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한층 가속화할 것이다.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했던 유럽은 국경을 닫았고 각국마다 고립주의를 앞세우고 있다. 중국의 코로나19 창궐로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되자 미국은 자국이 주도한 세계화의 위험성과 취약성을 새삼 깨달았다. 미국의 패권은 비단 군사력과 경제력에만 기초한 게 아니다. 국제적 공공재 공급과 위기 조정력, 민주적 통제, 인권 신장 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국제사회의 리더로서 역할과 조정력을 발휘하지 못해 영향력이 줄어들 위기에 처했다. 중국은 이런 미국의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조심스럽지만 중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화가 나타날 수도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화란 무슨 말인가.
△국제규범이나 국제표준·국제협력 체계를 중국 주도로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서비스 산업은 크게 각광을 받을 것이다. ABC 즉, 인공지능(AI), 블록체인(Block Chain), 클라우드(Cloud)와 5세대(5G) 등이 대표적이다. 2003년 사스 창궐을 계기로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 중국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이 탄생했다. 의료·보건·바이오 분야의 대대적 투자도 일어나고 그에 따른 국제 거버넌스 주도권 다툼이 예상된다. 중국은 이미 ‘건강 실크로드’를 주창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중심의 세계화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중국 중심의 세계화 가능성은 낮은 편이지만 전혀 배제하지 못한다.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물론 반대되는 가설도 있다. 중국을 배제하는 세계화다. 예컨대 미국이 코로나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해 전 세계에 공급한다면 전세는 역전된다.
지난 1일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한 시민이 자가격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하이오주는 대표적인 러스트벨트로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게 완승을 안겨줬다. /콜럼버스=UPI연합뉴스
-미국 조야에서는 고립주의에 대한 반성이 많을 것 같은데.
△연초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이후 상황이 다소 달라졌다. ‘스윙스테이트(경합주)’에서 민주당 우세와 경합이 늘어나고 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최근 ‘포린어페어스’에 ‘미국은 왜 주도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론을 싣고 리더십 부활을 강조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 승자가 중국이라는 말도 있다. 탈세계화는 오히려 중국이 불리한 게임이 아닌가.
△중국 입장에서는 악재다. 미국이 소비하고 중국이 생산하는 지금과 같은 국제분업 구조에서는 중국이 득을 본다. 미국은 과거 개별 국가별로 대응하기 힘들어 세계화 기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미중 패권전쟁을 새로운 구조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탈세계화는 미국에 기회인 동시에 중국에도 기회다.
-중국의 ‘마스크 외교’가 위력을 발휘할까. 일부 국가에서는 불량품도 나왔는데.
△냉정하게 봐야 한다. 캐나다가 불량 중국산 마스크를 전량 폐기했지만 제3세계는 다르다. 서방 진영은 의료·방역 물자를 중국 외의 다른 경로로도 획득할 수 있다. 중국산은 질이 낮다는 인식도 있다. 하지만 비(非)서방 진영은 불량품이든 뭐든 상관없다. 중국의 지원 여부는 생존권의 문제다. 자기 세력권을 늘리겠다는 의도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00여개국 정상과 통화했다. 주로 미국이 등한시한 국가들이다.
-미중이 연초 체결한 무역 1차 합의가 유지될까.
△주미 중국대사는 2,00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제품 구매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지켜봐야 한다. 축소하거나 유보할 수 있다고 본다. 양측의 합의 조항을 보면 자연재해 등 합의 이행이 불가능하다면 상호 일방의 제안에 따라 합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물론 미국이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중국이 재협상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이 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한국의 피해도 컸다. 미국의 중국 화웨이 제품 보이콧 사태로 우리도 어려운 처지에 빠졌는데.
△앞으로 화웨이 사태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의 압박을 받는 일은 상수가 될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은 서로 자기편을 늘리려는 ‘관중의 국제정치’를 편다. 미국은 대립구도 속에서 한국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고, 중국은 중립적·균형적 태도를 요구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 사에서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편승하는 외교는 위험이 크다. 동맹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미국 편을 들거나 반대로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이유로 중국을 편들다가는 낭패당하기 십상이다. 그러자면 원칙을 갖고 사안별로 지지를 달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역시 원칙이다. 원칙은 국익과 상대국 포용성, 국제규범 합치다. 미국과 중국에 한국은 원칙을 갖고 대처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시 주석의 상반기 한국 방문은 물 건너갔는데.
△상반기 방한 추진에 변함이 없다던 외교부도 이제 어렵다고 보는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은 시 주석의 방한 시기를 직접 밝힌 적이 없다. 방한 시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 관리다. 과거 ‘운명공동체’ 언급처럼 우리가 미국보다 중국에 더 가깝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G2 패권전쟁이 격화한 상황에서 곤란하다. 우호 증진과 교류 협력 강화 정도의 담백한 메시지를 담는 것이 바람직하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He is…
1968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단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상하이 푸단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초빙연구원, 서울대 박사후연구원(Post-Doc), 대만 외교부 초청 방문학자 등을 거쳐 중국외교안보연구회장과 한국세계지역학회장을 지냈다. 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맡고 있고, 외교부와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책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