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경제 대공황 당시 미국 ‘뉴딜 정책’의 일부로 공공사업진흥청(WPA)이 진행한 공공건물의 벽화작업에 참여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필자는 대학 미술관의 소장품 담당 조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수장고의 서랍을 정리하면서 상당히 큰 뭉치의 판화들을 발견했다. 모두 소품이었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는 종류의 판화들이었는데, 조사해 보니 1930년대 WPA 프로젝트(1935~1943)에 의해 제작돼 주립대학교에 위탁 보관된 것임을 알게 됐다. WPA란 공공사업진흥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나중에 Works Projects Administration으로 변경)의 약자다.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인의 3분의 1이 실업자가 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부에서 일거리를 주선해 생활하게 했던 ‘뉴딜 정책’의 일부였다. 덕분에 약 300만 명이 건물이나 도로 건설, 도서관 등 공공시설에 투입돼 일을 하였고, 여성들은 병원이나 고아원에서 입을 옷이나 침구 등을 만들면서 그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미술가의 경우 판화·유화·벽화·포스터·조각·무대 디자인·공예 분야에서 일거리를 배당받아 주급 23달러를 받았다. 특히 많은 화가들이 공공건물의 벽화 작업에 투입됐다. 공동 작업을 하면서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WPA는 미술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아쉴리 고르키, 필립 거스턴, 스튜어트 데이비스, 루이스 네벨슨 등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2차대전 이후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작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국가 프로젝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진이었다. 사진가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이들이 주로 찍은 피사체는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먼지 폭풍이 극심해 농업경제도 파탄이 났다. 은행 빚 독촉에 시달리던 소작인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땅을 버리고 오렌지와 포도를 수확할 일꾼이 필요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몇 달에 걸쳐 낡은 차에 가재도구와 가족들을 싣고 캘리포니아로 옮겨간 이민 노동자들이 하루 6,000명꼴이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은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 ‘분노의 포도’에도 잘 묘사돼 있다. 뉴딜 프로그램의 하나인 농장안전운영단(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의 홍보 책임자였던 로이 스트라이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왜 연방정부가 이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지를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들을 여러 명 고용했다. 1935년에서 1942년까지 FSA에 참여한 사진작가는 워커 에반스, 벤 샨, 도로시아 랭 등이다. 이들이 일당 4불을 받고 이주자들이 거쳐 가는 길목에서 찍어 보낸 사진은 약 27만 장이 된다고 한다.
도로시아 랭이 1936년에 촬영한 ‘이주자 어머니’
도로시아 랭이 찍은 ‘이주자 어머니’(1936)는 한 장의 사진으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얼어버려 수확할 수 없는 콩밭이 있는 곳의 임시주거지 텐트 속에 남루한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어머니에게 두 아이들은 안식처를 찾듯 목과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한 손에는 어린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이 어머니는 카메라 밖의 먼 곳을 바라본다. 걱정과 근심이 얼굴에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함몰된 상태는 아니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들에게 다가간 도로시아 랭에게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방금 낡은 차의 타이어마저 팔았다고 했다. 도로시아 랭은 그때 이 여성의 나이가 32세였다는 것만 알았다고 한다 (여성의 이름이 플로렌스 톰슨이라는 것은 40년 후에 알려졌다). 랭은 두 아이에게 얼굴을 어머니와 반대쪽으로 돌리라 하고 촬영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머니의 얼굴에만 집중하게 된다. 원래 7명의 아이 중 3명만을 등장시킨 이유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 문제라는 부유층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저작권을 가진 이 사진은 그 후 수천 점의 우표, 잡지 표지, 티셔츠에도 사용됐다. 랭 자신도 사진 저널리즘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타자적 이미지는 이후 대도시에서 전시되어 강력한 호소력으로 사람들을 움직였으며, 곧 정부는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이주자 촌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토마스 하트 벤튼의 1936년작 ‘미주리 벽화’
1930년대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였다. 당시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집권하고,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되었으며, 스페인에서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랑코가 이끈 우파 반란군의 내전 끝에 프랑코가 정권을 장악하게 됐다. 미국의 경우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으로 기울어 있었다. 미술 분야도 1920년대 유럽에서 벌어진 추상미술, 모더니즘미술에 대한 매혹보다는 보수적인 사실주의로 현실을 반영하는 그림들이 많아졌다. 중서부 화가들을 중심으로 미국적 풍경을 그리는 국수주의적인 지역주의(regionalism)미술과 노동자나 도시의 하층계급의 삶에 초점을 맞춘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소련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와는 다름)가 대두했다.
지역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작가 토마스 하트 벤튼은 ‘미술은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며 프랑스의 추상미술은 퇴폐적인 외국문화’라고 공격했다. 그는 산업화와 대도시의 자본주의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미국의 본질은 중서부의 시골과 소도시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노동자와 소작인, 또는 작은 농장을 경영하는 농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벤튼이 미주리 주 의사당에 그린 벽화는 시골생활의 일상을 활기 있게 전한다. 농부는 소젖을 짜고,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아이는 우유를 마시며 남자는 신문을 읽는 일상의 모습이 보이고 왼쪽에는 농부들, 오른쪽에는 재판 장면이 나타난다. 벤튼은 물리적 에너지가 넘치는 근육질의 인물들을 율동감 있는 구성으로 통합시켰다.
에드워드 호퍼의 1942년작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
같은 시기의 에드워드 호퍼 역시 중산층의 평범한 일상을 즐겨 그렸고 프랑스 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벤튼의 그림은 캐리커처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미술은 미국 내에서만 이해되지 말고 보편성을 지녀야 하며, 지역이나 국가를 넘어서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적인 특질은 각 화가에게 내재해 있으므로 그것을 의도적으로 보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벤튼의 낙관주의와 달리 호퍼의 그림에는 외로움과 좌절감이 배어있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개인의 고독에 대한 것이다. 호퍼는 이제까지 미술의 배경으로 여겨지지 않던 아주 평범한 극장이나 주유소, 도시의 식당이나 사무실을 그렸다. 그의 인물들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서로 심리적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인물들은 대개 건축적 요소로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창밖을 바라보거나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거나 텅 빈 카페에서 외롭게 차를 마신다. 그림은 고요하고 침묵에 싸여 있다.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1942)은 실제 뉴욕 그리니치의 교차로에 위치한 식당을 그린 작품이다. 커다란 창 안을 들여다보면 덩그러니 세 사람이 앉아 있고 웨이터가 있다. 한 남자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고 두 남녀는 동행인 듯 보이지만 각각 자신의 상념에 잠겨 있다. 전경의 텅 빈 공간과 배경의 평범한 건물은 어두운데 식당 안은 당시 처음 나온 형광등의 조명에 의해 밝혀진다. 자세히 보면 빛은 아주 섬세하게 조절돼 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위치한 이 식당은 실제 장소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는 공간이다. 평범한 장면이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들의 삶에 대해 일상적인 드라마를 상상하게 된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 호퍼나 지역주의의 작품들은 추상미술의 대세에 가려지지만 호퍼의 작품들은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의 하나로 남아 있다.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