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김태년 신임 원내대표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연합뉴스
이해찬 대표의 편지, "우리는 그 때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지난 달 17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1대 국회 초선 당선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7선 국회의원이자 당의 큰 어른이 보내는 서한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을 겁니다. 편지로도 부족했는지 이 대표는 최근 초선 당선인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늘 ‘열린우리당’ 시기를 당부한다고 합니다. 원내대표로 선출된 김태년 의원 역시 초선 당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에서 “초선이었던 열린우리당 시절 과오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도대체 그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당 대표도, 원내대표도 그렇게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내는 것일까요.
2004년 3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며 주가가 급락한 12일 증권거래소 직원들이 물안에 가득한 모습으로 신문을 읽고 있다./서울경제DB
이야기는 열린우리당이 창당한 2003년 시작합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시한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 등 새천년민주당 내 소장파와 영남권 의원 등이 당의 쇄신을 요구, 새로운 당을 만듭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발언을 두고 ‘공직선거법 위반’ 시비가 일었습니다. 이는 새천년민주당 중심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의결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여론은 야당의 탄핵소추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고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을 기각했습니다.
탄핵 역풍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152석으로 과반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모든 것이 여당 뜻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판단했지만그 순간은이야말로 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전체 71%에 달하는 108명의 초선 의원들이 그 씨앗이었습니다. 이른바 ‘탄돌이’라 불린 그들, 지금의 여당을 이끄는 우원식·우상호·노웅래·이인영 의원 등은 물론 김태년 원내대표 역시 그 중 하나였습니다.
김부겸·임종석 의원 등 단식중인 열린우리당 초선의원 5명이 2004년 4월 총선을 하루 앞둔 14일 부산역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나라당의 부산 싹쓸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서울경제DB
"선배들이 군기를 잡아? 물어뜯겠다!" |
2006년 9월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고(故)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연합뉴스
당내 계파 대결도 치열했습니다. 당시는 노 전 대통령이 한미 FTA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등을 추진하며 진보 진영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거기에 의원들도 152명이나 되니 노선이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당의 왼쪽에는 송영길·우상호 의원 등 386 운동권 출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모색’, 개혁국민정당 출신의 유시민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참여정치연구회’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조배숙 의원 등이 참여한 보수 성향의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의정연구연대’, ‘민주평화국민연대’, ‘바른정치모임’, ‘신진보연대’ 등 숱한 계파들이 백가쟁명 식으로 찢어져 싸우고 이합집산하는 나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참여정치연구회 소속의 임 의원은 안개모를 겨냥해 “개혁을 하지 말자는 제2의 후보 단일화 협의회(16대 대선 당시 민주당 반노그룹)”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끝없는 싸움은 결국 개혁 입법의 실패로 돌아왔습니다. 여당은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과거사기본법·사립학교법·언론관계법)’을 추진했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열린우리당은 과반이라는 우위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당내 보수 성향 의원들마저 반대에 나서며 자중지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개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천정배 원내대표가 사퇴했습니다.
문희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2005년 경상남도 김해갑에 출마한 이정욱 후보자를 찾아 지원 유세를 하고있다./서울경제DB
이후 열린우리당 앞에 남은 것은 끊임없는 내리막길 뿐이었습니다. 2005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선 6석 의석을 한나라당(5석)과 무소속(1석)에 모두 빼앗기며 과반을 잃었습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선 광역자치단체장 16석 중 1석(6.3%), 기초자치단체장 230석 중 19석(8.3%)를 얻는 데 그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참여정부 레임덕은 가속화됐습니다. 2007년 의원들의 탈당 릴레이가 시작되며 민주당, 중도개혁통합신당 등으로 쪼개지며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때는 '탄돌이', 중진들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임 |
더불어민주당 송재호(왼쪽부터), 이소영, 민형배, 김영배, 이해식 초선 당선인이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그린뉴딜’ 토론회에서 원내대표 후보인 김태년 의원의 축사를 듣고 있다./연합뉴스
‘열린우리당의 악몽’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177석 슈퍼 여당이 된 민주당은 2004년 총선 때보다 25석이나 더 많은 의석을 얻었습니다. 초선 비율도 38%로 높은 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연일 고공행진하지만 임기 후반 레임덕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을 강력한 카리스마로 휘어잡던 이해찬 대표의 임기도 오는 8월이면 마무리됩니다.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교훈을 새긴 중진들이 많다는 점은 긍정적입니다. 전직 원내대표인 우상호·이인영·우원식 의원은 물론 김태년 원내대표 역시 당시 초선으로서 뼈아픈 교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 때 ‘탄돌이’였던 중진들이야말로 제2의 열린우리당을 막아야 할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김인엽기자 insid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