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여 일간의 잠행을 끝내고 복귀한 가운데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이 추구하는 한반도 평화 구상에 과연 협조할지 다시 한 번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정은이 복귀한 직후 한국과 중국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가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다. 북한은 최근 한국군 감시초소(GP)에 총격을 가하고 남측 군사 훈련을 비방한 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겐 김정은이 직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한 칭찬·격려 친서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미중관계 악화를 이용해 대미 협상력을 기르려는 전략을 들고 나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보건협력과 관련해서도 한국보다는 중국에 가장 먼저 기대를 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반해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군사적 도발과 비방을 ‘대화 의지 메시지’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북미 대화 교착 상태에서 김정은이 한국 정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 때문에 이 해석에 반대하는 입장도 나온다. 일각에선 한국을 상대로 한 김정은의 모든 행보가 실상 미국을 향한 메시지일 뿐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여전한 가운데 6월 판문점 견학 재개, 6·15 남북공동선언 행사 준비 등 문재인 정부의 남북협력 사업 독자 추진을 두고 북한이 어떻게 호응하는지가 김정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강원도 고성통일전망타워 인근에서 바라본 보존GP와 금강산. /연합뉴스
한국엔 GP에 총 쏘고 ‘내로남불’ 비방... 中엔 “전염병 승기 축하”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8일 1면에 김정은이 시 주석에게 구두 친서를 보낸 사실을 알렸다. 신문은 “총서기 동지가 중국 당과 인민을 영도하여 전대미문의 전염병과의 전쟁에서 확고히 승기를 잡고 전반적 국면을 전략적으로, 전술적으로 관리해나가고 있는 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축하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지난 2월1일 시 주석에게 위문 서한을 보낸지 석 달 만에 ‘친서 외교’ 나선 것이다. 시 주석은 이에 대해 지난 7일 구두 친서를 보내고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 나가길 원한다”며 “나는 북중 관계 발전을 매우 중시한다”고 화답했다.
김정은은 9일에도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김정은은 축전에서 “오늘 조로(북러)관계는 공동의 원수를 반대하는 성전에서 전우의 정으로 맺어진 친선의 고귀한 전통을 이어 부닥치는 온갖 도전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두 나라 인민들의 지향과 염원에 맞게 더욱 발전하고 있다”며 “당신(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인민이 반드시 (코로나19 방역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기를 충심으로 축원한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연일 비방 보도를 하고 있다. 북한 대외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9일 신형 호위함 ‘동해함’ 진수식, 지상·공중비상대기항공차단 훈련 등을 두고 ‘북침 전쟁 소동’ ‘대결 망동’이라고 비난했다. 이 매체는 “앞에서는 대화와 평화 너스레를 떨고 뒤 돌아 앉아서는 전쟁 책동에 날뛰고 있다”라며 “남조선 군부 호전광들이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현대판 야누스들이며 이로 인해 차려질 것은 북남관계 파국과 전쟁 위기의 고조뿐”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신문도 8일 3면에 우리의 서해 훈련을 비난하는 보도를 실었다. 신문은 북한 인민무력성 대변인 이름으로 담화를 내고 지난 6일 공군공중전투사령부(공중전투사)가 해군2함대와 함께 서해 상공 작전구역에서 실시한 방어훈련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게 하는 군사 대결의 극치”라고 비방했다. 신문은 “온 민족 앞에 확약한 북남(남북)군사합의에 대한 전면 역행이고 노골적인 배신행위”라며 “적은 역시 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고 뼛속 깊이 새겨주는 기회가 됐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한국군 GP 총격엔 침묵하다가 우리 측 군사 훈련에만 딴죽을 건 셈이다.
앞서 북한은 지난 3일 오전 7시41분께 강원도 비무장지대 아군 GP 외벽에 총탄 4발을 발사한 바 있다. 청와대와 우리 군은 북한이 우발적으로 사격을 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진상은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방어훈련에 대해서는 9·19 군사합의 위반이 아니라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잠행을 벗고 1일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 /연합뉴스
중·러와는 교류협력 의지... 대남 관계엔 비중 두는지 ‘미지수’
상당수 전문가들은 김정은 복귀 후 북한의 이 같은 국제사회 메시지가 코로나19로 보건·경제 분야에서 궁지에 몰린 현실을 타파할 일종의 전략으로 진단했다. 우선 중국에 대해서는 코로나19 방역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보건협력을 중심으로 무역 정상화를 꾀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미국과 중국이 코로나19 발원지를 둘러싸고 갈등 관계에 휩싸인 가운데 중국의 편을 확실히 들어 ‘혈맹’ 지위를 재확인하고 각종 협조를 얻어내려 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게다가 미중 갈등 국면에서 중국의 편에 힘을 실으며 존재감을 알리는 것이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협상 재개에도 외려 유리할 수 있다는 계산을 깔았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중국보다 중요도는 떨어지지만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 시도도 비슷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이에 반해 한국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한국 정부의 남북협력 구상에 발맞춰 대화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 등이 한반도 내에서 대규모 훈련을 할 때마다 북한이 관행적으로 비방을 해온 데다 국지적 군사 도발 역시 심심치 않았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을 향한 북한의 각종 메시지는 주어만 한국일 뿐 결국 코로나19에 쏠린 미국인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시도로 대부분 해석할 수 있다는 진단도 내놓았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3월에도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이름으로 담화문을 내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존재를 맹비난했는데, 당시 담화문엔 ‘청와대의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는 제목을 붙여 표면적으로 한국 정부를 겨냥해 놓고 발표 시간대는 미국 시간에 맞춘 바 있다.
박지원 민생당 의원은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보건 협력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도 친서를 보내야 한다”고 공개 요청했다.
북한 발사체. /연합뉴스
‘ICBM 수용가능’ 시설 포착... 美정보수장 지명자 “핵무기 우려”
이런 가운데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우려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국 북한 전문 사이트 ‘분단을 넘어(BEYOND PARALLEL)’는 이달 5일(현지시간) ‘신리 탄도미사일 지원시설’이라는 보고서를 웹사이트에 게시하고 북한이 평양 순안국제공항 인근 ‘신리’라는 곳에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확장과 관련한 것이 거의 분명한 대규모 시설 완공을 앞두고 있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새 시설 가운데 천장 고도가 높은 건물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5’와 북한의 모든 탄도미사일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크다.
이 시설은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알려진 적이 없는 곳이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북한은 순안공항 남서쪽, 평양 북서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에 2016년 중반 이후부터 이 시설을 짓기 시작했다. 이 시설은 차량 이동형(드라이브 스루)으로 연결된 세 개의 대형 건물, 대규모 지하시설, 위성으로 관측되지 못하도록 가린 철로 터미널, 주택단지 등으로 구성됐다. 평양 지역의 탄도미사일 부품 제조 공장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사이트는 현재 속도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이 시설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가동 준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함께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자인 존 랫클리프 하원의원은 같은 날 미국 상원에서 열린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 정권의 계속되는 핵무기 보유와 이를 발사할 수 있는 시스템 추구는 여전히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랫클리프 지명자는 “(북한의) 무기들이 미국과 역내 우리 동맹국들에 가하는 위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우리는 이 위협에 계속 집중해야 하고 정책 입안자들이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전 제출한 서면 답변에서도 “나는 북한이 군사행동으로부터 정권을 보호하고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핵무기를 필수적인 것으로 계속 보고 있다고 믿는다”며 “다만 북한은 제재 완화와 기타 정치적, 안보 이익을 위해 일부 핵과 미사일 양보를 기꺼이 거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北야생화로 신약 개발”... 김정은, 文정부 협력 제안 응할까
한편 한국 정부는 북한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독자적 남북협력 사업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선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행사 공동 개최, 추가적인 남북정상회담 등 문재인 정부가 마련 중인 각종 사업에 대한 북한의 호응 여부가 김정은의 속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지난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국제 제재를 피해 한국 정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남북협력사업부터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특히 판문점 견학 재개 문제와 관련해서는 “시범적으로 6월부터는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북한 총격 논란에도 전날 경기도 파주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 평화의길, 감시초소(GP) 등 현장을 방문해 견학 재개 준비상황을 살폈다.
김 장관은 “남북협력사업 중 동해북부선 연결사업이나 판문점 견학 등은 우리 내부적으로도 할 수 있는 것들”이라며 “6·15남북공동선언 20주년 공동 행사 등은 남북 대면접촉이 필요한 만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장관은 무엇보다 보건 분야에서 남북 공동의료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표적으로 북한 야생화 등을 활용한 천연물 신약 개발 등을 거론했다. 김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도 국제제약과 환경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자고 말했다”며 “일시적인 방식보다는 지속 가능한, 부분적이기보다는 포괄적인, 일방적 지원보다는 협력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고 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