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기간산업 지원 과정서 기업에 무거운 모래주머니 채워선 안돼”

[신성환 한국금융학회 회장]
'뉴딜'로 과도한 재정지출하면 국가신인도 하락
기업 재무구조 손상에 충분한 회복 기간 필요
자금시장 양극화 막을 보완책 마련도 절실해
이분법적 규제에서 벗어나 금융자율성 키우고
교육·안전 등 생산성 향상에 정책 초점 맞춰야


신성환 한국금융학회장이 8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기간산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기업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채워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오승현기자

금융시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다. 외견상으로는 코로나19 사태 초기의 극심한 혼란에서 벗어나 자금조달에 숨통이 트이는 듯하지만 기업 실적 악화와 신용등급 강등에 따른 시장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신성환 한국금융학회장은 지난 8일 “정부가 기간산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발목을 잡거나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채워서는 안 된다”며 “기업이 회생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인 신 학회장은 또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과 관련해 “방만한 재정지출은 국가 신인도 하락과 외화자금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우리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 학회장을 만나 요동치는 금융시장과 정부 대책의 실효성 등에 대해 들어봤다.

-자금시장이 당국의 돈 풀기로 최악의 상황은 넘겼다는 얘기가 나온다.

△일단 자금시장이 경색 국면에서 탈피하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자금 양극화 현상은 오히려 심해질 것이다. 괜찮은 회사는 1차 지원을 받아 신용경색에서 벗어나더라도 취약한 기업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금융시장 대책은 부분적으로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 자금시장을 전면적으로 개선하지 못한 채 신용등급이 괜찮은 회사를 유동성 위기로부터 막아내는 성과를 이끌어냈을 뿐이다. 신용상태가 좋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어려운 기업은 계속 유동성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는 지원 규모나 속도 측면에서 아쉽다는 목소리가 높은데.

△자금지원 규모만 놓고 보면 외국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 하기 어렵다. 미국과 우리의 경제규모를 고려할 때 그렇다. 다만 소상공인 지원 규모는 미국에 비해 확실히 작고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미국은 중앙은행을 통한 시장개입을 미리 준비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중앙은행이 개별 기업이나 산업을 지원하는 과정에는 한국은행법 개정 등 걸림돌이 많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고 누가 책임을 맡아 유동성을 공급할지를 놓고 부처 간 불협화음도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교하면 어떤가.

△더 어려운 점도 있고 유리한 점도 있다. 사실 금융위기 때는 정부가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았다. 금리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었고 양적완화 여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다. 금리는 낮아질 대로 낮아졌고 지난 10여년간 부채도 상당히 늘어났다. 그럼에도 정부가 빠른 의사결정으로 자금을 투하해 실물위기의 금융시장 이전을 막았다는 점은 나름 평가할 만하다.

-기간산업안정기금이 본격 가동될 예정인데.

△지금은 천재지변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고용 및 실물경제에 파급력이 큰 기간산업이 무너지는 사태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 다만 정부가 어떤 형태로 유동성을 지원할지 결정하는 디테일이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19가 끝나도 기업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비할 수 있도록 지원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들은 이미 코로나19로 상당한 부채까지 떠안아 재무구조가 악화됐기 때문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걸어가야 하는 형편이다. 정부는 모래주머니가 너무 무겁지 않도록 일부를 자본 형태로 지원하되 조급해하지 말고 기업에 충분한 회복기간을 줘야 한다. 기업의 다리를 더 튼튼하게 만드는 대신 모래주머니를 무겁게 해 주저앉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기업들은 정부의 경영간섭을 걱정하는 분위기인데.

△정부에서 보통주가 아니라 우선주만 보유하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영간섭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정부 스스로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경영에 직접 개입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만 기업들도 과도한 배당을 자제하고 고용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사전에 동의해야 한다. 그런 후 기업이 정상화돼 정부가 투하했던 자본을 비싸게 팔고 나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는가.

-한국은행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많다.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있어 한은도 결국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한은이 특정 회사채를 직접 매입하기보다는 시장의 회사채를 사들이거나 신용위험을 안고 자금을 시장에 공급할 때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특정 기업에 자금을 대주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중간에 보증을 서거나 책임을 대신 떠안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임 금융통화위원들이 앞으로 대단히 힘든 시기를 겪게 될 것이다. 비전통적인 통화정책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향적인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 시장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금기시됐지만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정부로부터 국채를 매입하는 ‘부채의 화폐화’도 신중히 검토해볼 만하다.

-일각에서는 차제에 기업 구조조정을 병행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금은 유동성 위기 해소와 구조조정을 함께 추진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일단 유동성 문제를 해결해놓고 그다음에 필요하면 산업 차원의 구조조정을 생각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 지금 구조조정까지 같이 추진하면 모든 게 엉켜버릴 가능성이 높다. 산업 차원의 구조조정은 당연히 다음 단계의 핵심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다만 정부가 인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일단 백지 상태에서 기간산업 등을 지원한 뒤 구조조정 청사진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과거 외환위기를 ‘벤처붐’으로 넘겼듯이 이번에는 혁신기업에 자금 공급을 늘리는 방안이 많이 거론되는데.

△그것이 산업정책의 맹점이다. 정부가 오직 공급자 측면에서 혁신기업을 띄워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생각에만 머무른다면 자원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시장은 한마디로 수요와 공급으로 이뤄진다. 시장만큼 기업의 옥석을 제대로 가릴 수 있는 곳은 없다. 정부가 할 일은 괜찮은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거나 기술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다양한 통로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유독 개인투자자를 겨냥한 금융사고가 많이 발생했는데.

△금융당국이 제 역할을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규제는 무조건 풀어도 안 되지만 무조건 강화해도 안 된다. 소비자 보호와 금융시장 안정의 관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제에 집중해도 부족한 판에 당국의 관심이 산업정책 등으로 분산돼 오히려 화를 키웠다. 라임자산운용 환매중단 사태만 해도 사모펀드 규제를 풀 때 소비자 보호보다는 위험자본 활성화라는 산업정책적 측면에서 이뤄졌다. 이게 펑크가 난 것이다. 당국이 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문제가 터지면 뒤늦게 달려드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건전한 자본시장 육성을 위한 방안이 있다면.

△자본시장이 발전하려면 플레이어, 즉 정책당국과 금융회사·금융소비자 간에 신뢰가 구축돼야 한다. 그러자면 금융당국에서 먼저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할 필요가 크다. 미래지향적인 감독에 초점을 맞춰 금융사와 소통하고 소비자에게는 투자자책임원칙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 이제는 당국도 금융회사와의 적대적 관계에서 벗어나 리스크를 줄이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부동산시장도 대출 규제로 옥죄는 분위기인데.

△세계적으로 우리처럼 건전성 규제가 강제력을 발휘하는 나라는 흔하지 않다. 선진국의 경우 어디까지나 권고 수준이고 은행은 건전성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따른다. 이를 어길 경우 약간의 불이익만 받을 뿐이다. 우리처럼 민간금융사의 행위 하나하나를 당국에서 직접 규제하는 것은 매우 강압적이고 후진적인 방식이다. 규제행태도 이분법적이다. 지역과 가격에 따라 대출비율을 결정하고 제한하는 규제는 말이 안 된다. 이분법적 규제에서 다면적 규제로 바꾸고 과감히 은행의 자율성에 맡겨야 한다.

-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미국과 달리 뉴딜 추진과정에서 재정적자가 커지면 국가 신인도에 문제가 생기고 외화자금이 유출돼 상당히 어려운 상황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쓸지는 매우 중요하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뉴딜 추진과정에서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결합한다고 하지만 도로나 노후 국가기반시설에 대한 투자 위주의 뉴딜이 과연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 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해야 한다. 일본이 잘못된 재정정책으로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때다.

-미증유의 경제위기에서 효과적인 재정의 역할은 뭔가.

△정부가 자금을 집행할 때 민간이 그 효과를 이어받아 유지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코로나19가 진정된 후 재정을 동원한다면 생산성 향상과 규제 혁파에 집중해 성장 잠재력을 높여야 한다. 같은 일자리를 만들어도 교육이나 안전 분야가 더 중요하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는 소프트파워를 키워야 국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정책당국이 중시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지금은 금융과 관련된 정책의 유효성이 거의 소진된 상태다. 금리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그렇다고 해서 투자나 소비가 늘어나기도 어렵다. 지금부터 재정정책의 디테일이 매우 중요하다.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쓸지를 놓고 많은 검증과 연구를 거쳐야 한다. 세부사항을 면밀히 연구하지 않고 현장에서 어긋나면 정부의 의도가 실현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반감되는 상황이 얼마든지 발생한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He is…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영등포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MIT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재무관리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금융연구원 부연구위원과 세계은행 금융정책실 선임재무역을 거쳐 금융위원회 시장효율화위원회 위원, 한국금융연구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포럼(WEF) 장기투자위원회 전문위원과 기금운용평가단 단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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