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목포 지역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해 처벌받았다가 지난 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고성수(58)씨. /사진제공=본인
“나는 살아서 다행이지만 무죄가 난 것도 모르고 하늘로 간 동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미안하기도 하고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둔 17일 당시 계엄군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겪고 유죄판결까지 받았던 고성수(58)씨는 서울경제와의 전화통화에서 안타까움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5·18 당시 목포시민들을 모아 계엄군에 맞서다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올해 1월 광주지법 목포지원 제1형사부(이영남 부장판사)가 재심을 열고 고씨를 포함한 목포 시위대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이미 절반인 5명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모진 고문의 후유증이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살아 있었다면 이들의 평균 나이는 64세에 불과하다.
고씨는 “죽고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가족을 생각해 버텨왔는데 무죄 판결이 나와 다행”이라면서도 “먼저 간 동지들도 직접 선고를 들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꿈을 찾던 고씨의 삶은 계엄군이 시민들을 학살하면서 한순간에 바뀌었다. 지난 1980년 5월21일 고씨는 시민들을 설득해 직접 시위대를 꾸리고 항쟁의 중심이던 광주 진입을 시도했다. 그는 “데모(시위)를 하면 어린 나이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면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지금의 목포 MBC 사옥 위치에 사람들을 모으고 시위를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위 8일 후인 29일 고씨는 ‘불법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연행돼 보름 동안 고문을 받았다. 고씨는 “머리에 수건이 씌워진 채 물에 머리가 처박히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연이어 당했다”면서 “너무 괴로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고씨는 지금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고씨는 “우울과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일을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됐다”며 “몸을 혹사하며 일에 집중해야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는 무죄 판결을 받을 만큼 좋아진 세상을 보니 마음이 편해진 것 같으면서도 20년이 넘는 젊은 날을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을 생각하면 참 허망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질문에는 오히려 담담했다. 고씨는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그에게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전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가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지난달 27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자신의 재판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고 알츠하이머를 이유로 재판에 나오지 않던 지난해에는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이 발견돼 비난을 받았다. /이희조기자 lov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