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상상을 더했더니 낙원이 됐다"

김보희 개인전 금호미술관 7월12일까지
美 트럼프 방한 당시 청와대 걸려 주목
정감있는 시선에 전통 삼원법 접목
숲은 공존과 생명력, 씨앗은 순환 은유

김보희 ‘테라스’. 2019년작으로 8개 캔버스에 그린 것을 합친 전체 크기는 324x520cm이다. /사진제공=금호미술관

붉은색 목재가 깔린 테라스로 향하는 길에서 라벤더와 로즈마리의 알싸한 향기가 먼저 손짓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병솔나무와 하귤, 야자나무 너머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싶을 정도로 푸르른 바다가 보인다. 오렌지색 테이블보가 덮인 탁자 위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아침 커피를 마신 흔적과 제주의 현무암, 전복껍데기가 남았다. 누구든 앉아 쉬라는 듯 비워둔 의자 옆 화집에 이름이 적힌, 중견화가 김보희의 신작 ‘테라스’다.

그의 개인전이 개막한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 1층 전시장의 정면 벽 전체를 이 작품이 독차지했다. 어디선가 본듯한 풍경이라면 작가의 집 겸 작업실인 제주의 실제 풍광이 눈에 익어서일 수 있고, 혹은 지난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 방한 당시 청와대 본관 대통령 부인 접견실에 걸려 주목받았던 화제작의 강렬한 인상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청와대에서 빌려 간 작품은 ‘향하여(Towards)’로, 신작 ‘테라스’에서 아래쪽 테라스 부분을 뺀 것과 거의 같은 구도다.


김 작가는 162×130㎝ 크기의 캔버스에 각각 그림을 그린 후 8폭을 합쳐 대작 ‘테라스’를 완성했다. 파노라마촬영 사진처럼 반듯해야 할 테라스가 휘었다. 자연 속 현장에 직접 나가 화판을 펴고, 여러 폭을 그려 합치는 방식 때문에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떠올릴지 모른다. 호크니는 1980년대 내내 ‘어떻게 보이는가’를 고민했고 사진 콜라주와 같은 방식의 회화작업을 선보였다. 호크니의 시점(視點)이 큐비즘에서 진보한 분석적 접근이었다면 김보희의 애정 어린 시선은 소중한 시간들의 중첩이자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 방식에서 출발한 결과다. 전통 산수화에서는 고원·심원·평원의 투시법으로 자연을 자유자재로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봤고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했다.

김보희 개인전 전시 전경

작가가 일상에서 포착한 서정적 시선의 작품들을 1층에서 본 후 3층으로 올라가니 27폭을 이어 가로 길이가 1,458㎝인 초대형 작품 ‘그날들(The Days)’이 압도적으로 눈길을 끈다. 짙푸른 자연 한가운데로 들어간 듯한 풍경은 바다 위에 뜬 해부터 밤을 지키는 보름달, 원숭이·앵무새와 희귀하고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다. 이 그림을 보고 프랑스 세관원 출신 화가 앙리 루소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루소의 정글이 원시성과 생존을 위한 투쟁적 공간이었다면 김보희의 숲은 생명력과 공존의 터전이다. 미술사학자 심상용 서울대 교수는 평론에서 김보희의 회화를 “땅을 삶의 터전으로 바꾸어, 그 터전이 주는 생명력과 함께하는 행복의 이야기”라며 “회복과 치유의 해독된 풍경”이라 평했다.

김보희 개인전 전경. /사진제공=금호미술관


김보희 작가는 흰자귀나무 꽃을 그린 후 ‘자화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진제공=금호미술관

지하 1층은 씨앗과 꽃과 열매의 방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씨앗은 꽃과 열매가 소멸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자연 순환의 질서를 함축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솜털처럼 꽃을 피워 누렇게 시들고 작고 딴딴한 초록열매를 맺기까지 인생의 여정을 한 가지에서 보여주는 흰자귀나무 꽃을 그린 후 작가는 ‘자화상’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시들어 축 처진 모습이 나같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일상에 상상을 더해 그린 풍경이 곧 낙원”이라며 “황혼 풍경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고 좁은 길로 가라는 아스팔트 표식도 눈여겨 보게 되는 시절”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생명과 사랑의 원숙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전시는 7월 12일까지 열린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제공=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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