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야경’(1642년)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1606~1669)은 그가 활동했던 17세기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네덜란드 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이고, 나아가 예술가의 특정 유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추구한 예술가 유형이다. 렘브란트가 처음부터 외면받았던 것은 아니다. 예술가로서 데뷔한 직후부터 인기가 있었고 찬탄을 받았는데, 어느 시점부터 형편이 나빠진 경우에 속한다.
렘브란트가 언제부터 내리막을 걷게 된 것일까. 렘브란트를 둘러싼 상황이 분명하게 나빠진 것은 40대 중반부터다. 이 무렵 그림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화면에서 어떤 부분은 꼼꼼하게 묘사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거칠고 대범하게 처리했다. 붓질은 커지고 물감을 점점 두껍게 발라 마치 페이스트리처럼 물감의 층이 도드라졌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더욱 리드미컬해졌고 힘이 넘쳤다. 그림 속의 인물이 관객에게 돌진하는 느낌이었으며 표정이 갈수록 미묘해졌다. 의혹과 회의, 혹은 체념이 담긴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거나 못내 수긍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렘브란트가 노년으로 갈수록 더 뚜렷하고 깊어졌고, 오늘날의 관객이 렘브란트에 대해 갖는 경이로움은 많은 부분 여기서 기인한다. 하지만 알아보기 쉬운 이야기가 담긴 단순한 그림들을 좋아했던 당대 네덜란드 사람들이 보기에 렘브란트는 점점 이상해진 것이었다. 한때는 수많은 초상화와 종교화를 주문받아 분주했던 렘브란트지만 주문이 점점 줄어들어 아예 끊기다시피 했다.
렘브란트가 대표작인 ‘야경’을 그리던 무렵이 분기점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시민계급은 이런저런 단체의 구성원들을 한 화면에 넣은 초상화를 주문했다. 1640년 무렵 민병대 대장 프란스 반닝 코크가 주문한 것도 그런 초상화였다. 렘브란트는 훈련을 위해 병기창을 나서는 민병대 대장과 대원들을 리드미컬한 빛과 움직임으로 구성했다. 대원들이 무기와 장비를 챙기며 나아가는 모습에서 수런거리는 말소리와 절그렁거리는 금속음까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그림은 주문받았던 목적에서 크게 어긋났다. 집단 초상화니까 구성원 모두의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있게 그렸어야 했다. 이 점은 당대의 다른 화가들이 그린 집단 초상화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어떤 사람은 도드라지고 어떤 사람은 그늘 속에 물러나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가려져 있다. 작품의 조형적 효과에만 몰두해 그림의 쓰임새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뒤로 렘브란트는 집단 초상화 주문을 받지 못했다.
프란스 할스 ‘성 게오르기우스 민병대의 장교들’ (1649년)
실패를 피하려면 실패할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는 실패로 이끌어가는 흐름 속에서는 그게 실패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야경’이 렘브란트의 생애에서 드라마틱한 분기점이 된 것처럼 서술한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알아보기 쉽도록 세워놓은 표지일 뿐이다.
예술가 개인으로서의 실패가 예술적으로는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렘브란트가 괴이하고도 독특한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당대 취향에 잘 맞춰서 부족할 것 없이 중년과 말년을 보냈더라면, 그는 17세기 네덜란드 여러 화가 중 한 사람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오늘날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서 깊은 감동과 복잡한 상념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얄궂게도 예술가는 개인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예술적으로 성공했다.
일단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곤란과 불운이 겹쳤다. 렘브란트는 한창 잘나가던 30대 초반에 큰 집을 구입했는데 이때 대금의 일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나눠내기로 했다. 형편이 나빠지면서 결국 잔금을 내지 못했다. 젊은 시절부터 방만하게 외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고 갖가지 골동품을 사들이던 습관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1656년 7월, 렘브란트는 법원에 개인파산을 신청했고 법원은 집을 비롯한 재산 전부를 압류해 경매에 넘겼다.
렘브란트 ‘자화상’ (1655년)
렘브란트는 일찍 부인과 사별했고 두 번째 부인도 16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외아들도 1668년에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다음해에는 며느리도 죽었다. 렘브란트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 속에서 자화상을 많이 그렸고 그림 속의 그는 불행과 고독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노년과 말년의 자화상도 훌륭하지만 그가 중년에 그린 자화상들에도 주의를 기울여보면 좋을 것 같다. 결말을 알고 보는 드라마처럼 안타까우면서도 묘하게 전율을 일으키는 구석이 있다. 자화상 속에서 예술가는 세상과 자신 사이에 생긴 화해할 수 없는 균열을 의식했는지 난감해한다. 언제부턴가 방향을 잘못 잡았고, 이제는 고단한 앞날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경이로운 미지의 세계로 이끌 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이연식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