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에 ‘팝아트(Pop Art)’가 있다면 조선에는 ‘민화’가 있었다. 팝아트가 많은 사람들의 선호를 뜻하는 ‘파퓰러(popular) 아트’의 줄임말이니, 백성 민(民) 자에 그림 화(畵) 자를 쓴 ‘민화’와는 명칭부터 일맥상통한다. 마침 호림박물관이 연간 기획전으로 올 한해 민화특별전을 개최하기로 하고 그 첫 전시인 ‘서가의 풍경-책거리·문자도’를 열고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책가도 8폭 병풍 중 일부. /사진제공=호림박물관
조선 후기인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크게 인기를 끈 민화는 부귀와 번영을 상징하는 모란꽃 그림을 비롯해 서가의 모습을 그린 책거리, 유교의 주요 덕목인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의 특정 문자를 다채롭게 장식한 문자도 등 다양하다. 특히 ‘문체반정’을 선언한 정조의 명으로 제작된 책가도는 조선만의 독특한 그림 양식으로 주목받는다. 정조가 신임하던 도화서 화원인 단원 김홍도가 그 초기 양식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호림박물관의 책거리 전시는 정조의 어좌 뒤에 설치됐음 직한 ‘책가도 10폭 병풍’으로 시작한다. 훗날 서가의 책과 진귀한 기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책가도와 달리 이 그림은 오로지 책으로만 빼곡하다. 이처럼 왕실에서 처음 그려진 책가도는 면학과 출세를 상징해 점차 상류층에서 인기를 끌다가 민간에까지 유행하게 됐다. 그림 속 책은 그 자체로 벼슬을 상징했고 벼루·먹·붓 등의 문방구류는 선비정신을 뜻했다. 분홍 꽃술에 흰 꽃잎을 가진 살구꽃은 과거 급제, 병에 꽂힌 공작 깃털은 문인으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도 8폭병풍 중 ‘효제충신’ 부분. /사진제공=호림박물관
문자도 8폭 병풍 중 ‘예의염치’ 부분. /사진제공=호림박물관
대중문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민화 책거리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상당히 과시적이다. 19세기 조선이 청나라를 통해 들여온 최신 문물과 귀한 골동품이 그림에 등장한다. 푸른색 도자기는 정조가 왕실행사 때 사용하던 청나라 수입품이다. 블루모스크를 만드는 이슬람교의 푸른빛을 받아들인 중국 원나라의 청화백자는 영국·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전해져 ‘시누아즈리(chinoiserie·중국 취향)’라는 중국풍의 대유행을 일으켰다. 독일의 마이센, 네덜란드의 델프트,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등이 모두 그 영향을 받았는데 이것이 다시 돌아 19세기 조선에 이르러 책거리 그림에 등장한 것이다. 이 밖에도 값비싼 옥기, 아라비아 숫자가 적힌 줄 달린 괘종시계, 아무나 쓸 수 없던 안경 등의 사치품들은 검소함과 합리주의를 강조한 정조 시대에 부를 과시하고 싶은 신흥 부자들의 욕망 분출구였다. 요즘 SNS를 통해 유행하는 ‘플렉스(Flex)’를 연상시킨다. 플렉스는 ‘구부리다’는 뜻의 단어지만 힙합 문화에서는 래퍼들이 자신의 부를 뽐내는 것을 의미한다.
변경희 뉴욕패션기술대학교(FIT) 교수는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팝아트가 자본주의·상업주의와 관련있던 반면 한국 민화의 팝아트적 성격은 ‘사람들의 욕망’과 밀접하다”면서 “18세기 후반 사람들이 물질문화 성장에 대한 자신감과 향유를 느끼던 와중에 등장한 민화는 사치품에 대한 동경과 지향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된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표적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유명해지고 싶어 미술을 택했다”는 말대로 유명인사가 된 것과 달리 민화 작가들은 거의 ‘무명씨’였다.
장수를 기원하는 ‘수(壽)’ 자와 행복을 비는 ‘복(福)’ 자를 다양한 형태로 반복해 적은 ‘백수백복도 병풍’ 중 일부. /사진제공=호림박물관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문화 콘텐츠가 되려면 사람들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한다. 순수예술이 한두 걸음 앞서 간다면 대중예술은 딱 반 걸음 정도만 앞서야 외면받지 않고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통설처럼, 민화도 대중의 눈높이에서 쉬우면서도 해학적인 표현으로 ‘재미’를 잃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백수백복도’는 장수를 기원하는 수(壽)와 행복을 비는 복(福)자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병풍 그림인데, 개구리·사슴·용·올챙이 등의 동물과 꽃·나무·구름 등 각종 자연 소재 등을 변형해 같은 글자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 감탄을 자아낸다. 표수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 씨가 많은 식물로 자손이 많기를 바라는 연꽃·석류·수박·오이·가지·참외를 비롯해 열매가 많이 달리는 넝쿨식물 등이 즐겨 등장한다”면서 “중국식 발음이 대길(大吉)과 같은 귤, 불로장생의 영지, 신선처럼 살기를 바라는 수선화, 백년해로를 상징하는 기러기 등을 그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교 덕목의 가르침, 삶의 교훈도 ‘민화’를 통하면 좀 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문자도’이다. 문자도에서 효(孝)라는 글자는 잉어·죽순·부채·거문고·귤 등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병에 걸린 계모를 위해 한겨울에 얼어붙은 강에서 구해온 잉어, 어머니께 드릴 죽순을 구하지 못해 슬피 흘린 눈물에서 돋아난 대나무, 부모의 베개를 시원하게 하려 부치던 부채, 위험한 순간에도 부모를 위해 타던 거문고, 배고픔을 참고 어머니께 드리려 품고 달려온 귤 등의 고사가 담겨 있다. 충(忠) 자에는 충정의 새우, 단단한 껍질처럼 변치 않는 조개, 절개의 상징 대나무가 함께 쓰였다. 믿을 신(信)자에 새 두마리와 편지가 그려진 것은 한나라 때 흉노에 억류된 소무(蘇武)가 믿음을 갖고 기다린 끝에 기러기 발목에 묶인 편지가 도착해 석방된 사연에 여신 서왕모가 찾아와 무병장수를 기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의 새인 청조(파랑새)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호림박물관은 7월 말까지 책거리·문자도 전시를 열고 이후 화조화, 산수·인물도의 민화를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