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식(왼쪽 세번째) 경총 회장과 김명환(〃 두번째)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20일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 열린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사회적 대화’ 본회의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 /권욱기자
# 지난달까지 서울 구로디지털단지는 눈에 띄게 한산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정보기술(IT) 업계가 가장 빠르게 재택근무로 전환하면서 근로자들이 출퇴근할 필요가 없어져서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다. 앞으로 재택근무 솔루션 개발 등 각종 프로젝트가 이어질 텐데 현행 주 52시간 근로제로는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IT 업계 관계자 A씨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을 3개월로 늘려주는 차선책이라도 적용해주면 프로젝트가 몰릴 때 인력배치를 효율적으로 하면서 주 52시간제의 취지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기 주 52시간 근로제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비단 바이오 업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동차부품·도금 등 원청의 주문에 따라 집중적으로 공장을 돌려야 하는 제조업 하청기업은 물론 정부가 코로나19 이후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힌 IT·스타트업들도 근로시간 규제에 난감함을 토로하고 있다.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은 유연한 근무방식이 코로나19 이후에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장기적으로 유연근무제도 정비에 나서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전 세계는 포스트 코로나 대비를 위해 규제 완화 등 전면전에 나섰는데 한국은 갈라파고스 규제에 발목이 잡혀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의치 않다면 올해 말까지라도 한시적인 근로시간 규제 완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제 활성화도 스타트업 경쟁력도 ‘주 52시간’ 앞에서는 무용지물=자동차부품 업체 관계자 B씨는 24일 서울경제에 “경제가 언제 다시 본격적으로 살아날지는 모르지만 V자 반등이 이뤄진다고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자동차 회사가 차를 더 만들면 우리는 따라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밸류체인이 ‘일시정지’된 상황에서 공장을 돌릴 수 없지만 감염병의 특성상 사태가 진정되면 밀린 일감이 한꺼번에 몰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노사정이 합의한 대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이 6개월로 확대됐다면 3~5월 석 달 동안 근로시간을 40시간 이하로 단축하는 대신 이후의 근로시간을 64시간으로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20대 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은 탓에 현재 단위기간은 3개월에 불과하다.
특히 스타트업 업계는 선택적 근로시간제가 확대되면 인력 운용에 숨통이 트였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코로나19 이후 근무장소에 제한을 두지 않되 개인용 컴퓨터 가동시간으로 근로시간을 측정하고 근로시간을 정산하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선택근로제가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정산기간이 1개월에 불과해 초과근로를 할 수 있는 기간이 보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지금 벤처 중에서도 사업이 잘되는 곳이 있다”며 “정산기간을 3개월로 늘렸으면 융통성이 확실히 좋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제도 개선”에 노동계는 “무한정 야근” 반발=고용노동부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 주 52시간 계도기간을 올해까지 1년간 두기로 하고 지난 1월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에 ‘경영상 이유’를 추가해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특별연장근로가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경영상 사유에 따른 근로시간 연장기간이 1회 최대 4주에 불과한데다 연장근로 사유가 발생할 때마다 고용부에 인가를 신청해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번거롭다. 재계가 노사 합의로 적용할 수 있는 탄력·선택근로제의 확대를 요구하는 이유다.
20일 시작된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 회의’에서도 유연근무제가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노동계의 반발이 예상된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14일 경영발전자문위원회에서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 등 유연근로시간 제도 확대가 우선적으로 추진돼야 하고 원격·재택근무와 같은 유연 근무방식이 확산되도록 그에 맞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20일 노사정 대표자 회의 본회의에서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근로시간을 줄여 추가 고용을 창출하자는 ‘일자리 나누기’와는 결이 다르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동계 관계자는 “유연근무제는 정확하게 말해 연장근로를 더 시키고 싶은 것”이라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도 1년이 걸렸는데 유연근무제를 논의하기에는 이번 사회적 대화 기간이 너무 짧아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노총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3개월→6개월)는 찬성하지만 선택근로제 정산기간 및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 확대에는 반대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모든 종류의 유연근로제를 현행대로 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연말까지라도 한시적으로 유연근무제 신속하게 시행해야”=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노동제도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노동계의 반발로 전면적인 시행이 여의치 않다면 한시적 규제 완화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주문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포스트 코로나의 제1과제는 경제회복을 위해 탄력근로제와 선택근로제가 현장에 정착될 수 있도록 단위기간과 정산기간을 현실화하는 것”이라며 “다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부담스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코로나19 사태 이후 일정 시점부터 6개월 동안은 탄력근로제를 자유롭게 실시할 수 있도록 하든지, 근로자 대표와의 서면합의 등 규제요건을 완화하든지, 한시적으로 문호를 개방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기”라고 덧붙였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리쇼어링(해외진출 기업의 국내 회귀)을 이야기하지만 집토끼(국내에 남아 있는 기업)부터 잡아야 한다”며 “노동집약적 기업은 규제를 풀어도 못 돌아온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서 52시간제는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변재현·이상훈·박한신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