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
호킹지수(hawking Index)라는 게 있다. 2014년 수학자 조던 엘런버그가 만들어낸 일종의 ‘완독률’ 수치다. 스티븐 호킹의 저서 ‘시간의 역사’가 세계적으로 1,000만 부 이상 팔렸지만 워낙 어려운 물리학 책이다 보니 실제 다 읽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 같은 개념을 만들었다. ‘시간의 역사’의 호킹지수는 6.6%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수치를 밑도는 베스트셀러가 있다. 2013년 출간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다.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200만 부 이상 팔린 이 책의 호킹지수는 2.4%를 기록했다. 그만큼 책이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피케티가 6년 만에 내놓은 신간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전작보다 더 방대하다. 한국어판은 거의 1,300페이지에 달한다. 관심이 있더라도 지레 겁먹을 만한 책이다. 하지만 한국어판 해제를 맡은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경제학 서적이라기보다는 역사서 혹은 종합 사회과학서적에 가깝다”며 “문·사·철의 위력을 느낄 정도”라고 독자를 다소 안심시킨다.
지난 2월 6일(현지시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런던 정치 경제 대학(LSE)에서 열린 ‘자본과 이데올로기’ 영문판 출간 기념 강연에서 신작 주요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이 이사장의 말처럼 피케티는 신작에서 불평등의 근원을 찾기 위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시대별로 주요 국가의 정치, 사회, 계급 구조를 파헤친다. 불평등은 경제적이거나 기술공학적인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불평등은 인간들이 주체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낸 구조라고 정의하고, 각국의 불평등 변화 패턴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는 점을 발견해낸다.
1부는 사회적 불평등과 그 정당화의 기원을 다뤘다. 사제(성직자)-전사(귀족)-제3신분(노동자와 농민)으로 이뤄진 3원 사회에서 사제는 지식인 역할을 하면서 불평등을 합리화했다. 이 사회에서 토지와 재산 소유는 사제와 전사의 몫이고 제3신분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채 노동을 통해 세금만 내야 한다. 이런 3기능적 신분사회는 19세기 서유럽이 소유자 사회로 전환될 때까지 이어진다. 소유자 사회는 사적 소유를 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는 사회로, 자본가가 득세하는 지점이다.
2부는 유럽 열강의 제국적 식민주의가 국경을 넘나들며 불평등을 전개한 궤적을 따라간다. 특히 식민지배를 종언한 유럽 국가들이 그에 따른 배상을 피지배 노예들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유럽의 노예소유자에게 공들여 했다는 점을 지목한다.
피케티는 20세기 들어 볼셰비키 혁명과 1·2차 세계대전, 유럽 사민주의사회 출현 등이 이뤄진 직후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가장 완화됐다고 분석한다. 누진세 도입과 뉴딜정책 등이 이에 기여했다. 하지만 긴 역사에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다. 서구의 보수 우경화, 소련과 공산주의 몰락을 거쳐 불평등은 다시 폭발적으로 커진다. 금융자산의 세계화와 초집중, 조세피난처가 보여주듯이 이제는 불평등이 국가 경계를 막무가내로 넘나들고, 부의 불평등이 대물림된다.
피케티는 이런 현시대를 3부와 4부에 걸쳐 다루면서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한다.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다. 브라만 좌파는 학력·지식·인적 자본의 축적을 지향하고, 상인 우파는 화폐·금융자본의 축적에 의거한다. 과거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던 좌파 정당이 고학력·고소득 정당으로 바뀌어 가고, 전통적인 부자들의 정당인 보수 정당들은 사회토착주의를 통해 가난한 50%를 유인한다. 이는 미국과 유럽에서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고 피케티는 지적하는데, 한국도 다르지 않다. 소위 ‘강남 좌파’라 불리는 이들이 브라만 좌파에 해당한다. 브라만 좌파가 학력 엘리트, 상인 우파는 자산 엘리트를 대변하면서 노동자와 저소득층은 소외되는 정치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현재 불평등이 다시 위험한 수준으로 증대돼 있다면서 자신만의 여러 실험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재산세나 토지세 같은 사적 소유에 부과되는 모든 세금을 누진 소유세로 통합 하고, 그 재원을 청년 자본지원에 쓰자고 급진적인 제안을 한다. 이는 대략 국민소득의 5%에 해당하는데 유럽의 경우 25세가 되는 청년에게 1인당 12만 유로(1억6,000만원)를 줄 수 있게 된다. 모두를 위한 사회적 상속을 실현하자는 주장이다. 또 노동자의 기업 의결권을 더 많이 나눠갖고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참여사회주의다.
‘공공 금융등기부’란 개념도 내놓았다. 자본에 대한 초민족적 규제를 시행하기 위해 금융자산 소유 정보 등록을 강제하자는 것이다.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의 정치권력 독점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민주적 평등 바우처를 만들자고도 한다. 일종의 정치 기부금 바우처로 자신이 원하는 정당, 정치운동에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개념이다.
책이 먼저 출간됐던 프랑스와 일부 영어권 국가에서는 피케티의 제안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에 피케티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책도 이토록 광대한 주제를 다 파헤칠 수는 없고 당연히 얻어낸 결론은 불안정하고 잠정적이다. 새로운 성찰을 촉발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