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 해제를 요구하며 입장을 밝혀달라고 제시한 답변 시한이 단 하루 남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아직까지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수출 규제 해제 논의를 위해 잠시 중단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를 다시 밟는 등 대일 압박 강도를 높일지 주목됩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2일 “일본이 문제 삼은 무역관리 상의 미비점을 모두 보완했다”며 “수출 규제 강화 조치 관련 해결 방안을 이달 말까지 밝혀줄 것을 일본 정부에 촉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은 지난해 7월 불화수소를 비롯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대 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한 바 있습니다. 강화 사유로 한일 정책대화 중단, 재래식 무기 캐치올 통제 미흡, 수출관리 조직·인력 불충분 등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요. 정부는 수출 규제 이후 일본 측이 문제 삼은 사항을 모두 개선한 만큼 이제는 일본이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는 애초부터 일본이 수출규제를 강화하면서 내놓은 이유들이 “말이 안 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부리는 몽니의 싹을 자르기 위해 문제라고 제기한 부분을 한층 더 개선한 것뿐”이라며 “우리나라의 수출 관리 체계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수출 규제를 원상 복구하는 게 우선이라 판단해 논리가 빈약한 주장이라도 받아줬다는 얘기입니다.
정부의 이 같은 노력에도 일본의 반응은 시원치 않습니다. 산업부의 공개 요청 직후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수출관리는 일본 당국이 종합적으로 평가해 운용해 나간다”면서 원론적인 입장을 내놨습니다. 정부가 제시한 답변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일본 측은 여전히 이렇다할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시한 내 답변을 받지 못한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됩니다. 정부가 꺼낼 수 있는 패는 크게 두 가지로 보입니다. WTO 제소 절차 재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입니다. 앞서 정부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두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유예한 바 있습니다.
다만 지소미아 종료의 경우 자칫 한일 갈등이 한·미일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만큼 당장 꺼내들기는 쉽잖아 보입니다. 한미일 안보 삼각 공조를 중시하는 미국이 지소미아 종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정부가 WTO 제소 절차를 다시 밟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됩니다. 정부는 일본과 양자협의 과정에서 제소 절차를 중단했는데 다음 단계이자 본격적인 재판에 해당하는 분쟁해결패널 설치를 WTO에 요청하는 것입니다. 양국 갈등이 다른 나라로까지 번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합니다.
통상당국은 언제든 제소 절차를 재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만 통상당국 내에서 당장 제소 절차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있습니다. 통상당국의 한 관계자는 “일본과 수출규제를 놓고 대화하는 쪽에서 ‘대화가 더는 의미 없으니 제소 절차를 밟아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다시 절차를 재개할 것”이라면서도 “아직까지 (제소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진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WTO 제소 절차를 재개하더라도 수출 규제를 원상복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WTO의 최종심 격인 상소기구가 개점휴업 상태이기 때문이죠. 상소기구는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무역분쟁을 조정하려면 최소 3명 이상의 위원이 필요합니다. 헌데 현재 상소위원 중 6명은 임기가 만료돼 정상적인 판단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상소위원 추가 선임은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결정되는데 WTO를 못마땅해하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상소위원 선임을 반대하고 있어 개점 시기를 가늠할 수도 없습니다. 1심에서 우리가 승소하더라도 상소기구 부재로 최종 판결은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일본이 수출규제를 꺼낸 근본 원인이 강제징용 판결문제에 있는 만큼 이 문제를 매듭짓지 않으면 수출 규제를 돌리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제징용 판결문제는 정치적으로 휘발성이 큰 사안이라 정부가 여기에 손을 댈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핵심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로 반도체 공정 차질 우려가 불거졌던 초기와 달리, 1년여가 지난 지금 국산화나 수입처 다변화 등으로 국내 업체의 생산은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정치적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강제 징용 문제를 다룰 필요가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양쪽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는 형국이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