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중앙은행의 역할

물가 보다 '금융안정' 중요한 지금
기준금리 0.25%P 추가인하 타당
부채 디플레이션 막는데 역점 둬야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17세기 후반 유럽은 화폐가 부족했다. 당시의 화폐는 지금과 달리 금이나 은 같은 금속 화폐였다. 지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16세기 초·중반에는 멕시코와 볼리비아(당시에는 페루)에서 다량의 은광이, 뒤에는 브라질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귀금속이 유입됐다. 그와 함께 100년이 넘게 물가가 상승하는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유럽에 유입되던 귀금속의 양은 17세기 중반이 되면서 급감했다. 생산량이 정체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된 귀금속을 신대륙 자체에서 사용하는 양이 증가했다. 신대륙이 아시아와 향료·비단 무역을 확대하면서 동양에서 선호하던 금과 은을 사용한 것이다. 화폐의 공급이 줄면서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디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다.

당시 유럽은 느리지만 실물 부문이 팽창하던 시기였다. 화폐공급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 중 하나는 팽창하는 실물 부문에서 거래의 편의가 저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화폐공급이 너무 느리면 교환의 매개수단이 부족하고 너무 빠르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화폐공급을 관리해야 하는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았다.


발권기능을 갖춘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으로 알려진 영국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1694년에 창립됐다. 당시 영국도 화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17세기 중반에는 내전이 있었고 네덜란드와 식민지 및 무역주도권을 위해 세 번이나 전쟁을 치르면서 재정이 파탄 났다. 1672년에는 국가부도를 선언했고 1688년에는 국왕의 무분별한 징세에 반발해 국왕을 폐위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립된 것이 영란은행이다. 위기관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중앙은행의 주요 임무였던 셈이다. 영란은행은 정부의 은행이었으나 주식회사로 운영됐으며 국유화된 것은 1946년이다. 국유화 이후 1998년부터는 우리와 유사하게 독립적인 공적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참고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는 1913년에야 창립됐다.

우리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모법인 한국은행법 1조 2항에는 ‘한국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할 때에는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 6조 1항에는 ‘한국은행은 정부와 협의하여 물가안정목표를 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한국은행은 물가와 금융안정을 위해 통화신용정책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정책목표로서 금융안정은 2018년 법 개정을 통해 비로소 삽입된 조항이다.

중앙은행의 역할을 우리처럼 좁게 규정한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역할이 작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난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추가로 인하해 0.5%가 됐다. 초유의 일이다. 잘한 결정이라고 본다. 지금은 물가안정보다 금융안정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총재가 더 이상 추가 인하는 없다고 암시한 것이 옥의 티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금리 이외의 다른 정책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시의 적절했다.

현재 상황에서 기준금리의 인하가 투자와 수요를 진작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대가 지나친 것이다. 지금은 금융시장의 붕괴를 막고 부채 디플레이션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한국은행의 과제다. 경제의 정상적인 순환이 멈춰선 지금 디플레이션에 따른 실물 부문의 붕괴를 막는 데 통화신용정책이 사용돼야만 한다. 그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말 것과 함께 기준금리의 하한을 암시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언을 하고 싶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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