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싱크탱크로 꼽히는 브루킹스연구소의 모태는 지난 1916년 개혁주의자들이 세운 ‘정부연구소’다. 정부연구소 탄생을 지원했던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사업가 로버트 서머스 브루킹스(1850~1932)는 1922년과 1924년에 각각 경제연구소와 공공정책대학원을 추가로 설립한 뒤 1927년 세 기관을 합쳐 브루킹스연구소로 재탄생시켰다.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재단과 쌍벽을 이루는 진보 성향의 연구소다.
워싱턴DC에 자리한 연구소는 1930년대 이후 뉴딜정책과 유엔 탄생, 마셜플랜부터 주요20개국(G20) 협의체까지 주요한 정책 아이디어를 생산했다. 냉전시대에는 사회보장제도의 밑그림을 그렸으며 1990년에는 대외정책의 중심축을 지역협력 안보로 전환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브루킹스의 힘은 막강한 연구진에서 나온다. 300여명의 연구진 중 상당수가 최소 10년 이상 정부에서 행정경험을 쌓은 고위관료 출신이다. 이들은 정권이 바뀔 때 다시 행정부로 돌아가 활약한다.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때 피터 오재그 전 백악관 예산국장, 수전 라이스 전 유엔주재 대사 등 30여명의 선임연구원이 정부로 자리를 옮겨 화제를 모았다.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도 현재 연구소에서 재정통화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정권과 정파의 눈치를 보지 않기 위해 정부 및 특정 정당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금을 대는 기부자들로부터도 독립적이다.
‘플로이드 사망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유혈시위는 미국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실업난 등과 맞물려 증폭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브루킹스연구소는 “플로이드 사건은 고용·투자 기회에서 배제된 흑인들의 처지와 닮아 있다”고 분석했다. 사건이 발생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와 주도 세인트폴의 경우 흑인 가계의 중위소득이 백인 가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플로이드 사건은 단순한 치안유지 실패가 아닌 부의 격차를 줄이려는 경제정책의 실패”라는 브루킹스의 진단이 양극화로 고통받는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정민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