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2주 앞두고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 67년만에 가족품으로

국방부·보훈처, 김진구 하사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 열어

3일 대구 남구에 위치한 충혼탑에서 열린 ‘호국의 영웅 故 하사 김진구 귀환’행사를 마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국가보훈처

6·25전쟁 당시 전사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던 참전용사가 67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는 3일 대구 남구 충혼탑에서 고(故) 김진구(사진) 하사의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열었다.

이번 귀환행사는 유가족 30명과 국가보훈처장,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국유단), 대구시장, 대구 수성구청장, 50사단장 등과 6·25참전유공자회 등 6개 보훈단체가 참석했다.

행사에서는 유가족 대표에게 김 하사의 전사자 신원확인통지서를 전달하고 참전과정과 유해발굴 경과에 대한 설명을 진행했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이 호국의 영웅을 최고 예우로 맞이하는 명예선양의 의미를 담은 ‘호국영웅 귀환패’와 전사자 유품 등이 담긴 ‘호국의 얼함’을 전달했다.


김 하사는 1928년 2월 20일 경북 영일군 송라면 대전리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21세에 결혼해 슬하에 1남을 두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24세의 나이로 3살 아들을 두고 군에 입대했다.

이후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6·25 전쟁에 참전, 정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을 불과 2주가량 앞둔 시점에 벌어진 화살머리고지 4차 전투(1953년 6월 29일∼7월 11일)에서 전사했다.


4차 전투는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23군 예하 제73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벌인 전투다. 당시 국군 212명이 전사하고 16명이 실종됐다. 중공군은 1,418명이 사망했다.

고인의 유해가 발굴될 당시 개인호에서 부분 유해 및 골절된 상태로 발굴된 점을 볼 때 마지막 순간까지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기 위해 진지를 사수하던 중 적 포탄 공격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김 하사의 아들 김대락(69)씨는 지난해 11월 ‘유가족 유전자 시료채취’에 참여해 고인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 하사의 부인 이분애(90)씨는 “남편이 함께 처갓집을 가는 길에 업어주는 등 생전 남편의 다정한 면모와 함께한 추억의 애틋한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다”며 “남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오래동안 기다렸다”고 말했다.

김대락씨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사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아버지의 유해가 없어서 무덤이 없으니 자신이 죽으면 선산에 뿌려달라고 했다”며 “아버지를 찾아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 하사의 유해는 유가족들과 협의를 거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국유단 관계자는 “6·25전쟁 전사자 중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지난 20000년 4월 유해발굴을 개시한 이후 총 142명이다”며 “특히 비무장지대(DMZ)내 최초의 유해발굴인 화살머리고지에서 총 7명의 전사자 신원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