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는 다 계획이 있다]④21세기 대도시가 직면한 화두에 대한 고민과 해법이 담겨 있는 '킹스크로스'

김정후 런던대 박사 인터뷰
도시재생은 도시 진화 고려한 '단계적 과정' 중요
노후화된 건물도 현대적으로 요구되는 새 기능 충분히 소화
대원칙 하에 다양성, 유연성 갖춰야
경제적 측면에서도 분명한 목표와 성과 낳아
전 세계 '역세권 재생'에 큰 영감 주는 프로젝트
코로나는 우리가 마주한 도시 문제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

보행중심으로 거듭난 킹스크로스역과 세인트판크라스역 전경 /사진제공=김정후 박사

킹스크로스(King’s Cross)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대표하는 교통과 물류, 산업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기존 핵심 기능들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들어 런던 중심부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됐다.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졌고 버려진 건물들은 낙후되면서 슬럼가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킹스크로스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이다. 1990년대부터 킹스크로스 재생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2001년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이 체결됐으며, 이후 중앙정부·지방정부·민간 디벨로퍼·시민 등이 350여차례의 회의를 통해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2006년 마침내 최종 승인을 받아 건설이 시작됐다. 킹스크로스는 총 면적 27만㎡ 규모의 부지에서 진행되는 유럽 최대의 ’복합역세권재생사업‘으로 오피스·주거·리테일·문화·교육·레저·호텔 등을 순차적으로 조성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킹스크로스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인 현재도 이미 런던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으며,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런던의 모습을 크게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30년에 걸친 장기간의 변화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런던대학(City) 문화경제학과의 김정후 박사로부터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김정후 런던대학 문화경제학과 박사

-킹스크로스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복합 역세권재생사업‘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센트럴 런던의 교통허브를 재조직하면서 주변 일대의 쇠퇴한 주거·산업·상업 관련 기능을 종합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높은 수준의 시민참여와 공공공간 조성, 산업유산 재활용, 보행환경 개선, 주상복합개발, 혁신산업 유치 등 21세기 대도시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화두들에 대한 고민과 해법이 다각도로 시도되었기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이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대규모 부지에 두 개의 대형 기차역사를 포함해 여러 개의 사업들이 어우러져 추진 중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볼 것인가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도시의 진화를 염두해 둔 단계적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정해진 기간 내에 하나의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기보다 단계적으로 크고 작은 성과를 도출하여 시너지 효과를 유도한 것이다. 추진 주체는 물론이고 직·간접적인 이해당사자들 간에 충분한 공감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도시재생을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한국에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20세기 후반에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여러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몇몇 작은 변화는 있었지만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방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보행 친화형 장소를 구축하고 다양한 형식의 공공공간을 조성하는 한편 최대한 기존 건물을 재활용하는 것을 방향으로 잡았다. 그 동안 런던시장이 세 번이나 바꼈지만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장기적인 비전은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그에 맞춰 개별 사업이 추진되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된 산업 유산을 잘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산업유산은 ‘역사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다. 즉 특정시대의 사회경제적 생활상을 간직하고, 약간의 보수와 변형을 통해 현대도시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신축보다 기존 건물의 재활용이 더 많다.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킹스크로스역과 세인트 판크라스역은 기존 역사를 보수 및 확장했고, 그래너리 빌딩·기차조립 창고·동서열차 기지·독일 체육관·가스 저장고·콜드롭스야드 등 사실상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건물과 공간이 기존 건물의 재활용을 통해 탄생했다. 눈여겨 볼 점은 과거에 산업용으로 건립된 건물과 부속 공간이 현대적으로 요구되는 새로운 기능을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소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 가치를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변형을 거쳐 해당 장소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창조적·혁신적 장소들을 탄생시킴으로써 킹스크로스만의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리젠트 운하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대학 전경 /사진제공=김정후 박사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에는 개발업자·사업가·정부·정책전문가·도시계획가·건축가·주민을 포함해 다양한 주체들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각각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대원칙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 원칙하에 다양성을 충분히 존중했기 때문이다. 대원칙은 거시적으로 지속가능한 복합 역세권을 조성하는 것이고, 미시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공성과 보행친화형 장소를 조성하는 것이다. 특히 거시적·미시적 원칙을 구현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참여 주체 누구나 의견을 개진하고, 아이디어를 제안하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다 보니 각 영역별·장소별·건물별로 참여 주체들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했으며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구현될 수 있었다. 구석구석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건물과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또 궁극적으로 주민들과 상인들을 포함해 많은 시민들로부터 사랑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민들이 불편한 점도 있고 갈등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제 30년이 되었다. 현재 계획 중인 추가 사업들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10년 정도는 더 진행될 것이다. 시민들이 체감하는 불편함은 당연히 크다. 하지만 1~2년 단위로 계속해서 가시적인 변화와 성과가 나타나고 그것이 시민들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은 물론이고 새로운 사회경제적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비록 불만과 갈등이 존재하더라도 변화와 성과가 이를 조율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으로 ‘유연한 접근’을 꼽기도 한다.




1997년 킹스크로스의 관할 구청인 캠든자치구·런던컨티넨탈 철도·킹스크로스 파트너십은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의 장기적 비전과 방향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고, 이후 약 4년 동안 방법론을 찾기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프로젝트의 핵심과 논의된 일련의 사항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아우르는 시행사가 필요했는데 2011년 공모 당시 아젠트가 제시한 과정이 핵심을 관통했다. 아젠트는 단 한 장으로 구성된 파격적인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화려한 미사여구를 생략하고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의 비전을 구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과정’을 집약해서 제시했다.

-디벨로퍼로가 장소의 성격을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시행사가 결정된 이후 지역 정치인·주민·상인들과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회의를 개최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러 차례 회의를 진행하면서 합의에 이른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장소 만들기’다. 구체적으로 주민과 상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10개의 공원과 광장, 20개의 거리, 3만여 평의 공공공간을 목표로 제시했다. 킹스크로스 부지 전체에 걸쳐 개별 위치별로 상인과 주민들이 실제적으로 필요한 공간을 전문가들과 논의와 협의를 거듭해 세밀하게 계획 및 디자인했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효과도 중요할 것 같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를 복합 역세권재생사업으로 정의하는 이유는 경제적 측면에서 분명한 목표와 성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 쇠퇴가 최악에 이르렀을 때 킹스크로스 주변은 경제 활동은 고사하고, 사람들이 머물거나 지나가는 것조차 꺼릴 지경이었다.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유로스타의 출발점인 세인트 판크라스역, 지방을 연결하는 기차와 런던 시내를 연결하는 지하철이 다니는 킹스크로스역을 이용하는 연간 인원은 1,000만 명이 넘는다. 유럽의 새로운 혁신산업지구로 각광받는 판크라스 광장과 주변에는 이미 구글을 포함해 여러 개의 세계적인 기업들이 입주하거나 할 계획이다. 또한 5,000명이 넘는 학생과 교직원을 수용하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대학이 그래너리 빌딩으로 이전했고, 킹스블루바드 거리에 조성된 쇼핑거리, 최근에 완공된 콜 드롭스야드에 조성된 쇼핑몰·카페·레스토랑은 이미 런던을 대표하는 복합 상권으로 부상했다. 단일 역세권의 유동인구로서는 압도적으로 유럽 최대 규모다. 현재 전 세계 글로벌 혁신기업이 사무실 부지로 가장 선호하는 장소가 킹스크로스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킹스크로스 일대에 새로운 사업 기회와 일자리를 창출했고, 그에 따른 경제적 성과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이다.

구글 등의 기업이 입주한 판크라스 광장 /사진제공=김정후 박사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를 성공적인 도시재생이라고 평가해도 될까.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성공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적어도 현대도시가 마주한 화두와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시의적절한 아젠다를 접목했다. 또한 주민들과 상인들을 포함해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인정할만한 일련의 가시적인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영국은 최초로 대도시가 발달한 나라이고 도시의 쇠퇴를 가장 많이 겪었기에 도시재생도 가장 먼저 시작됐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도시의 확장은 교통시설의 발전과 비례하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차역이다. 1825년에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이래로 영국에는 많은 철도가 거미줄처럼 연계되었고, 그에 따라 지역별로 기차역이 건립되어 도시철도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런던에만 370여 개의 기차역이 건립되어 산업발전을 견인했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대부분 쇠퇴하여 기능을 상실했다. 신축을 하든 증개축을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지만 실제 사업을 시행하는 것은 어려웠다. 왜냐하면 기차역은 대규모 부지를 점유하고,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모두가 동의할만한 대안을 찾기 어렵고, 무엇보다 막대한 예산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런던에는 현재도 기차역의 기능은 유지되지만 주변이 극도로 쇠퇴한 지역이 많다. 이것은 전 세계 많은 도시들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사업의 시작부터 과정, 그리고 일련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영국의 다른 도시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 ‘역세권 재생’에 대해 충분한 영감을 제공했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가 하나의 재생 프로젝트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이유다.

리노베이션 된 킹스크로스역 중앙홀 /사진제공=김정후 박사

-한국에서도 도시재생이 화두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건물과 공간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무척 어렵다. 왜냐하면 지난 30년 동안 8만여평 부지에 추진된 도시재생사업의 결과로 탄생한 일련의 건물들과 공간들은 소위 랜드마크처럼 독보적이지 않지만 해당 장소를 활성화시키는 굳건한 동력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튀는 건물이나 공간보다 각 영역별로 역할을 담당하는 최적화된 건물과 공간을 만드는데 주력한 결과다. 킹스크로스에 새롭게 등장한 하나하나의 건물과 공간은 주변 맥락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곳곳에 자리한 건물과 공간이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을 뛰어넘는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복합 쇼핑몰과 공공공간으로 조성된 콜 드롭스 야드 /사진제공=김정후 박사

-언론의 역할도 중요한가.

장기적으로 추진되는 도시재생사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프로젝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화두를 던지고, 결과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언론이 감시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와 관련된 기사를 찾아보면 매 시점마다 권위 있는 전문가들과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비판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다. 이러한 건설적인 비판은 자연스럽게 프로젝트가 단계적으로 낳은 결과물을 리뷰하고, 문제를 개선하는 긍정적 기회를 제공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코로나19가 넓게는 도시에, 좁게는 도시재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속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오랜 시간 동안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진화한 결과다. 부정과 긍정의 양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도시에 전쟁에 버금가는 충격과 피해를 주었고, 이로 인해 도시가 일순간에 작동을 멈추었다고 해서 급격한 변화를 예측하거나 충동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안전하고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 순위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예를 들면 공공공간과 녹지의 중요성, 주택·업무·교육공간의 가변성, 의료시설의 입지와 효율성, 대중교통과 보행의 안전성, 상업 및 업무공간의 작업 환경, 건물 내외부의 친환경 성능 등이다. 사실 새로운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이제는 시민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분석·개선하고, 강화해야 한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의 많은 도시가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도시재생사업도 이를 효과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영위하는 도시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을 최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코로나19가 도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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