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면형의 집 앞에 심어진 녹나무는 여름철 우거져 그늘을 만들어준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를 잠시 벗어나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 천주교에서는 이를 피정(避靜)이라 부른다. 종교적으로는 묵상과 성찰기도 등 수련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조용한 곳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는 욕구가 커지는 요즘은 종교를 떠나 누구나 솔깃해지는 말이다. 휴가철 제주의 북적이는 인파에서 잠시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찾는다면 ‘면형의 집’이 바로 그런 곳이다.
면형의 집 내부 성당에서는 방문객 누구나 묵상이나 기도를 할 수 있다.
면형의 집은 제주 천주교 전례 초기부터 자리한 유서 깊은 장소다. 1902년 프랑스에서 온 에밀 타케 신부가 이곳에 홍로본당을 건립해 천주교 탄압으로 와해 위기에 처한 제주 천주교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처 신학교 역할을 하면서 사제들을 양성했기도 했다. 면형의 집은 복자회관, 면형의 집, 김기량 펠릭스베드로 수도원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 1959년부터 한국순교복자수도원에서 피정센터로 운영하고 있다. 면형(麵形)이란 밀떡의 형상을 한 성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설립자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성 용어 ‘면형 무아(麵形 無我)’에서 따왔다.
‘홍로의 맥’이라는 작품으로 재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온주밀감 나무.
면형의 집이라는 이름이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밀감나무 때문이다. 식물학자이자 서귀포성당 제3대 주임이던 타케 신부는 1911년 일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에게 왕벚나무를 선물로 보냈고, 그 답례로 온주밀감 나무 14그루를 받았다. 이것이 제주 귤 재배 역사의 시작이다. 당시 들여온 14그루의 나무 중 한 그루가 백 년 넘게 면형의 집 앞마당에 생존해오다 지난해 4월 고사했다. 면형의 집은 고사한 나무를 방부 처리해 성당 안쪽에 전시하고, ‘홍로의 맥’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국내 최초의 온주밀감 나무가 심어졌던 장소에는 60년 된 감귤나무가 그 뒤를 이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감귤나무 옆에는 감귤 시원지 기념비도 세워졌다. 한국 천주교 역사상 일반 주민들이 세워준 최초의 가톨릭 사제 공덕비라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고사목과 면형의 집 정원에 심어진 수령 220년 된 ‘성당 녹나무’를 서홍 8경 중 하나로 꼽고 있다.
면형의 집 앞 마당에는 지난해 4월 고사한 최초의 온주밀감 나무 대신 60년 된 후계 감귤나무가 자라고 있다.
면형의 집 뒷마당에 심어진 하귤나무에 큼직만한 귤이 주렁주렁 열렸다.
천주교 순례길인 ‘하논성당길’ 코스의 출발지로도 좋다. ‘서귀포 성당’에서 시작해 서귀포 신앙의 모태인 하논성당 터와 면형의 집을 거쳐 다시 서귀포성당으로 돌아오는 총 11㎞ 구간의 중간지점이라 어느 방향으로 가도 순례길의 절반은 둘러볼 수 있다. 제주 올레길과 달리 호젓하게 걷기 좋은 코스로, 걷는 중간에 올레길 6코스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글·사진(제주)=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