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외원조 프로그램인 AID 차관을 받아 지난 1974년 완공된 서울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 3구역 광경. 22일 5층 아파트 높이를 훌쩍 뛰어 넘게 자란 조경수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 재건축 조합은 분양가상한제를 피해 최근 100% 완공 후 분양을 결정했다. /이호재기자
1977년 촬영한 서울 강남 최초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반포주공아파트의 옛 모습. /서울경제DB
지난 1970년대 서울 ‘강남시대’를 연 반포주공아파트. 지난달 30일 마지막 남은 반포주공 1단지 3구역 재건축조합이 임시총회를 열고 100% 준공 후 분양을 결정했다. 다음달 말부터 분양가상한제가 시행되면 일반분양 일정을 최대한 늦추는 방식이 분양가를 더 받아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28일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21차 재건축 조합도 ‘후(後)분양제’를 선택했다. 후분양제가 강남 재건축 사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평당 시세 1억원을 찍어 서울 부촌의 지도를 바꿔놓은 서초구 반포·신반포 일대의 재건축 조합마다 후분양으로 돌아서고 있다.
재건축조합의 후분양 선택은 정부가 2017년 분양 가격을 우회적으로 통제하면서부터다. 현행 주택공급 규칙에 따르면 도시주택보증공사(HUG)의 분양 보증을 받는 경우 착공과 동시에 ‘선(先)분양’이 허용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연대 보증을 받아 후분양(공정률 60% 이후 일반분양 진행) 해야 한다. HUG는 보증심사 과정에서 과도한 분양가 책정을 막고 있다. HUG의 간접적 가격 통제보다 더 강력한 가격 규제책이 예고됐음에도 후분양 유행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분양가상한제가 후분양이든 선분양이든 모두 적용되는데도 말이다.
HUG의 분양가 통제를 피해 공정률 70%선에서 후분양을 선택한 상도동 주택조합 아파트 공사 현장. 지난 15일 1순위 청약에서 474가구 모집에 평균 22.8대1의 경쟁률로 마감됐다. /사진제공=롯데건설
가장 큰 배경은 시세의 60~70% 수준인 공시지가의 현실화율이 점차 높아지는 데 있다. 분양가상한제는 땅값과 건축비에다 적정 이윤을 반영해 산정하기 때문에 후분양 방식에서는 땅값 상승률이 높을수록 분양가를 더 받을 수 있다. 강남의 땅값 상승률은 해마다 두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금융비용 부담의 감소다. 기준금리가 0%대이고 유동성은 차고 넘친다.
사실 3~4년 뒤 후분양의 유불리를 현시점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경기와 물가 등 변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박원갑 KB금융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후분양제는 초과 수요가 존재하는 강남 주택 시장의 단면”이라며 “다만 일부 요지에서나 통하지 보편화한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자발적 후분양 확산은 ‘강남 불패 신화’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웃픈’ 현실을 반영한다는 분석도 있다. 일단 시간부터 벌자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반포 소재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는 “정부는 그동안 가격 규제를 풀었다 죄었다 반복해왔다”며 “재건축 조합들이 몇 년 뒤 분양가상한제 폐지에 베팅하는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건축 후분양은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배경은 지금과는 전혀 딴판이다. 참여정부는 2003년 ‘5·23부동산대책’을 통해 재건축 아파트에 한해 공정률 80%를 넘어야 일반분양을 허용했다. 공사 대금을 미리 받는 선분양 ‘특혜’를 배제해 과열된 재건축 시장을 식히겠다는 취지에서다. 2009년 완공된 반포 래미안(반포 주공 2단지)과 반포 자이(반포 주공 3단지) 등이 그에 해당한다. 투기 억제책으로 의무화했던 후분양을 이제는 가격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일 단지 국내 최대 재건축 사업인 서울 강동구 둔춘주공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분양가상한제를 반대하는 조합원들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곳은 선분양과 후분양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연합뉴스
후분양과 선분양의 득실을 놓고 갈등과 혼란을 빚는 조합도 있다. 단일 사업장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재건축 사업(1만2,023가구)인 둔촌주공아파트는 내홍 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합 집행부는 오는 7월 말 분양가상한제 실시 이전에 선분양한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조합원들은 “후분양이 정답”이라며 반기를 들고 있다. 이곳의 일반분양분은 자그마치 4,787가구. 강남 집값을 움직이는 변수로 작용할 정도로 엄청난 물량이 지난해 말 상한제 도입 예고 이후 묶여 있다. 일반분양을 기대하던 청약 대기자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려되는 것은 재건축 후분양이 초래할 후유증이다. 신규 분양 물량이 3~4년 뒤로 밀리는 것은 시장 안정에 좋지 않은 신호다. 가뜩이나 부족한 새 아파트에 대한 수요 갈증이 커질 공산이 크다. 분양가 상승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반분양 물량 자체가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재건축 조합들이 일반분양 가구 수를 최소화하는 대신 조합원 몫을 큰 평수로 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조합들 사이에서는 분양가상한제가 ‘조합원의 이득을 빼앗아 로또 당첨자에게 넘겨주는 제도’라는 불만이 팽배해 있다. 한마디로 ‘죽 쒀서 남 준다’는 것이다. 이미 신반포3차 경남아파트 재건축조합이 사업 추진 일정을 조정해 일반분양 물량을 줄였다. 후분양이 극심한 로또 청약 광풍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현금부자들의 잔치가 될 것은 불문가지다. 이는 분양권 차익과 투기 과열을 차단해 시장 안정을 기한다는 후분양제의 본래 취지에 반한다.
후분양제 도입에는 과거 여야가 따로 없었다. 부동산 투기가 극심했던 2005년 7월 한나라당 부동산대책특위 김학송(오른쪽 두번째) 위원장이 국회 기자실에서 분양권 전매 전면 금지와 공공 아파트 후분양제 시행을 촉구하고 있다./연합뉴스
사정이 이쯤 되자 후분양을 권장해왔던 정부는 스텝이 꼬이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2년 전 공공 부문의 후분양(공정률 60%) 물량을 올해 30%에서 2022년까지 70%로 끌어올리는 내용의 후분양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바 있다. 민간 부문 유인책으로 공공택지의 우선 배정 원칙도 세웠다. 하지만 국토부는 지난달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책에 따라 3기 신도시 물량에 대해 선분양보다 1~2년 앞당겨 공급하는 ‘사전청약제’를 실시하겠다고 예고했다. 후분양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상황인 것이다. 갈지자 행보는 정부가 처한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후분양이 환영을 받고 건설사(조합포함) 특혜 논란을 빚던 선분양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어이없는 현실은 주택공급 제도의 모순에서 발생한다. 도시계획박사인 장경석 국회 입법조사관은 “선분양 제도는 주택 대량 공급이 절실했던 1977년 주택 관련 법률을 제정하면서 분양가 규제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일종의 당근책이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분양가 규제와 선분양은 한 수레 두 바퀴여서 후분양과 분양가 규제는 엇박자라는 의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들이 2017년 11월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소비자를 위한 후분양제 도입을 촉구하는 텐트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후분양제는 역대 정부마다 뜨거운 감자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취임 첫해 건설교통부 업무보고에서 “다른 분야는 소비자 위주인데 주택 분양은 공급자 중심이다. 후분양제를 당장 도입하기 어렵다면 순차적 도입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건교부가 1년 뒤 내놓은 ‘후분양 3단계 로드맵’은 2011년 이후 후분양(공정률 80%)을 전체 주택 공급 물량의 절반까지 순차적으로 확대한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수도권 집값 폭등에 주택 조기 공급이 필요하다는 현실 논리에 밀려 2006년 로드맵 시행을 1년 연기하더니 결국 이명박 정부 때 없었던 일이 됐다. 앞서 김대중 정부 역시 분양가를 자율화하면서 후분양제를 도입하려다 자금력이 약한 중소건설사의 도산 우려로 접었다.
후분양 활성화와 분양가 통제는 잘못된 정책 조합이다. 후분양 추진이나 검토는 분양가 자율화 시대에 이뤄졌다. 참여정부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최종찬 건전재정포럼 대표는 “분양가를 묶어놓고 후분양을 하라는 것은 난센스”라고 일갈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략연구부장은 “100% 준공 후 분양은 완제품을 판매한다는 측면에서 가격을 규제할 논리적 근거도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규제는 시장의 보복을 부르기 마련이다. 가격 규제의 도피처가 된 후분양 신드롬은 이점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
김현미표 '생색내기' 후분양제의 전말 |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017년 동탄 신도시 부영아파트 부실시공 파문은 후분양제 도입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무려 8만여건의 무더기 하자 민원이 발생해 시공사는 3개월 영업정지라는 철퇴를 맞았다. 시민단체들은 후분양 의무화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고 정치권에서는 의원입법이 발의됐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그해 가을 국정감사에서 후분양제 도입을 시사하면서 LH공사 등 공공주택의 공정률 60% 이후 후분양 원칙이 마련됐다. 국토부는 시범 운영을 거쳐 추후 공정률 상향 조정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최근 3기 신도시 ‘사전청약제’까지 동원할 정도로 공급 속도전에 나선 상황이어서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 먼저 시행했던 참여정부가 그랬다.
2017년 10월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아파트 후분양제 도입을 시사했다. /연합뉴스
공정률 60% 후분양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그 정도로는 무늬만 후분양일 뿐 소비자 보호와 하자 방지 등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토연구원이 2018년 내놓은 ‘공동주택 품질 향상을 위한 분양제도 개선 방안’ 보고서는 최소한 공정률 80%는 돼야 품질 제고와 소비자 보호 기능이 작동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는 “하자의 대부분은 마감공사 때 발생하기 때문에 공정률 60% 시점의 분양은 선분양과 큰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공정률 60%는 골조 공사조차 채 마무리되기 전이어서 그 시점에서는 층간 소음과 균열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공정률 80%도 별 의미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소비자가 공사판에 들어가 주택 품질과 하자 여부를 확인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입주 후 사계절은 지나봐야 품질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략연구부장은 “후분양제의 목적을 소비자 보호 측면에 둔다면 100% 준공 후 분양이 아니라면 공정률 60%든, 80%든 별 의미가 없다”며 “착공 이후에 분양한다고 해서 무조건 후분양으로 부르는 것도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권구찬선임기자 chan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