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로마의 상수도

제국을 유지한 사회간접자본

로마는 거대한 도로와 상수도망을 제국에 깔았다. 속주인 프랑스 남부에 건설한 수도교인 가르교. /위키피디아

109년 6월25일 로마제국의 황제 트라야누스가 트라야나 수도(Aqua Traiana)의 수문을 열었다. 수원지는 로마 북서쪽으로 56㎞ 떨어진 브라차노 호수. 호수 물이 아니라 호수에 흘러드는 시냇물을 급수원으로 삼아 수질이 좋았다. 로마는 신선한 물을 시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수도(水道)를 깔았다. 증발과 수온 상승을 막기 위해 대부분(47㎞)의 수도관은 땅 밑에 심고 9.7㎞ 구간만 지상에 남겼다. 오늘날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거대한 2~3층 아치형 수도교는 로마 상수도 시스템의 일부에 불과하다.


트라야나 상수도는 11개인 로마 상수도 가운데 열 번째. 기원전 312년 등장한 아피아 수도가 최초다. 길이를 기준 삼아도 5위 정도다. 기원전 140년 완공된 마르키아 상수도는 90㎞에 달했다. 처음도, 최대도 아닌 트라야나 상수도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마지막 대중용 상수도였다(225년 건설된 알렉산드리나 상수도는 공중목욕탕 전용으로 쓰였다). 최전성기에 트라야나 수도가 등장하며 로마 시민 1명당 물 사용량은 84갤런으로 늘어났다. 물 소비가 가장 많다는 뉴욕시 브루클린 주민의 사용량 83갤런보다 많았다. 둘째, 아직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키아, 트레비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베르지네(로마시대 이름은 비르고) 상수도와 함께 기능을 유지하는 3개의 수로 중 하나다. 옛 수도를 중세에 복원하며 이름이 ‘파올라 수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셋째, 당시 사용된 고도 기술은 오늘날도 신비의 영역이다. 옛 지하수로 발굴 현장에서 성분을 알 수 없는 로마식 시멘트와 이집트산 청색 방수도료가 발굴됐다. 사이펀 원리와 역사이펀 원리가 규명되기 이전에 실제로 사용됐다는 점도 미스터리다. 로마는 상수도를 자기들만의 전유물로 삼지 않았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세고비아, 독일 쾰른, 튀니지와 이스라엘, 터키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수도교 유적이 남아 있다. 첨단기술을 속주에 이식해 제국을 유지하려던 의도가 읽힌다.

로마는 도로 건설과 유지비는 전액 부담했으나 상수도만큼은 속주가 냈다. 속주민들이 상수도를 원해서다. 찬란하던 로마 도로와 수도는 전쟁으로 인적교류가 줄면서 기능을 잃었다. 상수도 역시 이민족의 침투 루트로 사용될 것을 우려한 로마 장군들의 판단으로 끊어졌다. 사람의 왕래가 적어지며 시작된 시기를 역사는 이런 이름으로 기억한다. ‘중세 암흑기.’ 각국이 전염병 때문에 빗장을 걸고 있다. 바람직하지 않다. 물류까지 위축되면 어찌 될까 걱정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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