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몸 사릴 줄을 모른다. 주변에서 ‘그러다 탈이 나니 쉬엄쉬엄 하라’는데도 무대에서 진을 빼고 녹초가 돼야 성이 풀린단다. 가뜩이나 무대 욕심 많은 이가 갑상선암 투병에 1년의 공백을 가져야 했으니 그 갈증이야 말해 무엇하랴. 웬만한 내공 없인 힘들다는 1인 극 연극을 마치자마자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로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배우 차지연. “여전히 연기에 목마르고, 더 잘하고 싶다”는 그를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서고 싶었어요.” 어느 때보다 무대가 절실했다. 투병으로 1년간 떠나 있던 무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얼어붙은 공연계… 익숙했던 그 자리의 소중함은 더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차지연은 복귀작이었던 모노극 ‘그라운디드’에서 정신착란을 겪는 여성 전투기 조종사로 열연하며 호평받았다. “대본만 봤을 땐 텍스트가 좋아서 하겠다고 했는데, 연습에 들어가선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더라고요(웃음). 그래도 행복하게 작업했고, 그 에너지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게 된 것 같아요.” 성공적인 복귀, 이제 한숨 돌릴 법도 하지만, 또 힘든 무대를 택했다. 그는 오는 8일 개막하는 서울예술단의 대표작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 주인공 명성황후 역을 맡았다. 지난 2013년 초연과 2015년 재연 이후 5년 만의 무대다. 이 작품은 명성황후가 단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않았다는 역사적 기록에서 착안한 팩션극이다. 평탄치 않은 삶을 산 데다 역사적 평가마저 엇갈리는 실존 인물이기에 캐릭터 해석부터 까다로운 작품이다. 그러나 차지연은 “이 작품이야말로 배우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사고의 시간’을 안겨준다”고 자부한다. “잃어버린 얼굴은 상황에 대한 많은 해설보다는 눈, 호흡, 행동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많아요. 지나치게 친절한 작품들은 배우가, 관객이 사고할 시간도 없게 지나가 버리곤 하는데, 잃어버린 얼굴은 그렇지 않거든요.” 초연 당시 핵심 넘버의 작사에도 참여하며 공들인 작품이라서일까. 이 무대가 주는 숙제는 차지연에게 “거룩한 부담”이다.
이번 공연은 차지연 스스로에게도 흥미로운 ‘세 번째 만남’이다. 그는 지난 2015년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2013년과 2015년 공연 때는 황후의 모습을 파고들었다면 지금은 어머니로서의 민자영이 마음에 들어와요. 초·재연에선 ‘이렇게 하면 더 슬퍼지려나’ 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면 지금은 좀 더 담백한 접근으로 인간 민자영에게 다가서게 됐다고 할까요.” 민자영이 걸어간 여정, 그 속의 본질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차지연은 “관객들도 그 길을 같이 바라봐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있는 그대로가 다 드러나니까.’ 극 중 고종은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에겐 순간의 박제이겠지만, 누군가에겐 치열한 인생의 찰나가 담긴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2020년 배우 차지연의 사진 속엔 어떤 ‘그대로의 모습’이 기록될까. “열정은 뜨겁게, 그러나 욕심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 담겼으면 좋겠어요.” 이 바람이 녹아든 무대는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서울예술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