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삼청로 학고재갤러리는 오는 31일까지 전관에서 ‘그림과 말2020’전시를 연다. 1980년에 결성돼 1990년 해체를 선언하기까지 민중미술을 이끈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동인 16명이 참여한 전시다.
민정기의 2020년작 ‘1939년’. 인왕산 암벽에 일제가 새긴 ‘소화 14년’이 1939년이라는 점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상흔을 암시한다.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처음 ‘그림과 말’이 만들어진 것은 1982년이다. ‘현발’이 창립전을 1980년에 열고 1982년 전시를 기획하면서 회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 ‘그림과 말’이라는 제호를 붙이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림과 말’이라는 제호는 지금은 고인이 된 최민의 어느 에세이에 붙였던 제목일 거다.”
‘현발’ 동인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정헌 작가의 설명이다. 지금은 SNS 등 개인매체가 늘어 발언이 쉬워졌지만 40년 전 만해도 그림의 ‘발언’은 통제당하기 일쑤였다. 작가인 이태호 경희대 교수와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지연 독립큐레이터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자유로운 발언을 통제당한 그림이 그 본령인 소통의 기능을 온전히 회복해 삶의 맥락 안에서 생동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던 현발 동인들의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보여준다.
김정헌의 1982년작 ‘행복을 찾아서’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1982년 전시 때 민화풍의 전통 산수화를 배경으로 달리는 런닝 차림의 노인을 그린 ‘행복을 찾아서’를 선보였던 김정헌의 최근작은 ‘내 이름은 분홍’과 ‘내 이름은 초록’ 등의 추상화풍으로 자연이 갖는 녹색의 힘 등을 이야기한다. 민정기의 1983년작 ‘1939년’은 중일전쟁 당시 공습 포격 지시의 장면을 담고 있다. 최근 그린 인왕산 풍경화 제목 또한 ‘1939년’이다. 일제가 암벽에 새겨놓은 ‘천황폐하만세, 소화 14년’의 문구가 1939년을 가리키는 것을 통해 지워지지 않은 역사의 상흔을 암시한다.
임옥상의 2018년작 ‘흙A4’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1978년의 임옥상은 당시 북한이 판 제3땅굴 발견을 보도한 신문을 재료로 ‘신문-땅굴1~6’을 제작했고 “군부독재 시절 반공 심리를 이용해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 정부의 모습을 투영”했다. 40년 후 제작한 ‘흙A4’ ‘흙A5’ 연작은 “대지를 닮은 배경 위에 검은 먹선을 힘차게” 그었다. 예술을 통해 혁명과 해방을 추구해온 작가의 일관된 관심사가 바로 땅이요, 흙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시기간 내내 현장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서울 거리에 ‘풀’의 시인 김수영의 초상화를 판화로 찍어 포스터처럼 붙여온 작가 이태호는 이번 전시장 벽면에도 수시로 포스터를 붙일 계획이다. 작가 박불똥은 학고재 본관 안쪽에 화실을 꾸리고 동인의 초상 혹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중이다. 성완경은 사진 작업 수십 장을 펼쳐 놓고 “출품작을 고민하던 끝에 결국 전시 기간이 끝나버리고 마는” 솔직한 퍼포먼스형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강요배·김건희·노원희·박재동·성완경·손장섭·신경호·심정수· 정동석·주재환 등 총 16명이 참여했다. 1980~90년대 문제적 작가였지만 이제는 어엿하게 현대미술사의 한 장(章)을 차지하는 거장이 된 이들이다.
김정헌의 2020년작 ‘내 이름은 분홍’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김정헌의 2020년작 ‘내 이름은 초록’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한편 광주비엔날레가 기획한 5·18 40주년 특별전이 인근 아트선재센터에서 ‘민주주의의 봄’을 주제로 열리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들여다 본 특별전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와중에도 지난 5월부터 대만 타이베이, 독일 쾰른 등지에서 열렸고 서울·광주로 이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낯선전쟁’ 역시 전쟁을 계기로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며 진지한 메시지를 전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이태호의 2019년작 ‘푸른 김수영’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