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일본 근대 만든 '무가제법도'

1615년 중앙집권적 봉건제 마련


1615년 7월 7일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幕府)가 ‘겐나령’(元和令)을 내렸다. 도쿠가와 가문이 지배하는 중앙정부와 250여 개 다이묘(大名·지방영주) 간 관계를 담은 13개 조의 법령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크고 작은 영주들이 군웅 할거하던 센고쿠(戰國)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일본 특유의 봉건체제로 접어들었다. 특징은 강력한 중앙 정부의 존재. 쇼군(將軍)은 겐나령을 통해 다이묘들의 권한에 명확한 선을 그었다. 대표적인 제한 규정이 일국일성령(一國一城令). 각 영주는 큰 성 하나만 남기고 모두 부숴야 했다.


다이묘끼리 혼인도 규제 대상으로 삼았다. 쇼군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다. 다이묘들은 불만이었으나 한 마디도 못 냈다. 마침 오사카성 전투에서 승리해 위세가 더욱 등등해진 쇼군이 군령 형식으로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가문의 혈통을 끊어버린 쇼군 가문은 당당하게 권력 강화책을 밀고 나갔다. 쇼군 가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1717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다이묘들을 규제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무가(武家·일본 전체의 250여개 영주 가문)들이 지켜야 할 바를 규정한 이들 법령을 통틀어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라고 부른다. 500석 이상의 대형 선박 제조 금지, 기독교 엄금 등이 법령에 들어갔다.

다이묘들이 가장 성가시고 무서워했던 규제는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 지방 영주는 수도인 에도(江戶·도쿄의 옛 이름)에 1년 이상 머물러야 했다. 영지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에도로 대신 올라왔다. 본인이나 가족이 인질로 잡힌 영주들은 반란의 꿈도 못 꿨다. 산킨코타이는 의도하지 않은 경제적 효과도 낳았다. 다이묘마다 수행원 수백~수천 명과 함께 영지와 에도를 오가며 도로와 물류,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서양 중세의 지방분권적 봉건체제와 달리 중앙집권적 봉건체제인 막번(幕藩) 구조를 세운 쇼군 가는 공가제법도(公家諸法度)로 일본 왕의 권한도 제사장 정도로 국한했다.

무가제법도는 효과적이었을까. 그렇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만들었던 미국 역사학자 고 에드윈 라이샤워(주일 미국대사 역임) 교수는 ‘일본제국흥망사’에서 일본 서구화의 기반을 ‘안정적인 막번 체제’로 꼽았다. 쇼군의 감시 속에서도 영지의 힘을 키운 일본 서부의 유력 다이묘들은 왕정복고와 근대화를 이끌었다. 비슷한 시기,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유린했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도 ‘강희·옹정·건륭’이라는 명군들이 통치하며 중국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오직 조선만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숨이 나온다. 휴.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