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8일 오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언급한 가운데 북미 비핵화 협상을 주도하는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자신의 카운터파트 임명을 요청해 주목된다.
비건 부장관은 8일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나 “김 위원장이 이런 (북미 비핵화 협상 등) 사안에 대해 협상할 준비가 됐고 권한이 있는 카운터파트를 임명하면 북한은 우리가 그 순간 (대화할) 준비가 됐음을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북미협상과 관련해 북한에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것보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악재가 될 수 있는 ‘북한 리스크’ 관리에 방점을 둔 행보라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대북제재 완화 등 김 위원장이 요구한 단계적 비핵화에 대한 언급 없이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원론적인 메시지만 낸 만큼 북한이 협상에 복귀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조세영 외교부 1차관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8일 오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제8차 한미 외교차관 전략회의에서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거리를 두고 인사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실제 전날 비건 부장관 방한 때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 동행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북미 실무협상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 않은 미국의 비관론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후커 보좌관은 지난해 6월 30일 판문점 회동 전날 북측 인사와 비밀리에 접촉하는 등 북미협상을 막후에서 주도한 인물이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비건 부장관의 발언이 북한보다 남한을 겨냥했다고 입을 모았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한이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극단적인 대남 도발을 감행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와 여권을 중심으로 한미워킹그룹 등 미국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상황을 의식한 것”이라며 “남북을 동시에 관리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비건 부장관은 남북평화를 지지한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북한에 양보할 뜻은 없음을 확고히 했다. 그는 최근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담화 등을 통해 “미국과 마주 앉을 생각이 없다”고 한 것과 관련, “우리는 북한과의 만남을 요청하지 않았다. 이번 주 방한은 우리의 가까운 친구와 동맹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이 북한에 협상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대내외에 발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한가지 또 매우 명확하게 밝히고 싶다”며 “나는 최선희 제1부상으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으며 그렇다고 존 볼턴 대사(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로부터 지시를 받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비건 부장관은 대신 한반도 평화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지난 2년간 여러 만남을 통해 내린 결론으로부터 지침을 받는다”며 “그 비전은 한반도에 더 견고한 평화를 가져오고, 한반도 내 관계를 변혁하고,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제거하고, 한국 사람들을 위한 더 밝은 미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정경두 국방장관과 에이브럼스 사령관,/국방부 제공
북한이 제시한 협상 복귀 조건을 미국이 사실상 거부한 만큼 북미 대화 재개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북한도 대북제재 면제, 한미 연합훈련 영구중단 등은 미국이 받을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북한은 11월 대선 결과를 지켜본 뒤 움직이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은 오히려 자신들을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을 경고한 만큼 미국의 3차 북미 정상회담 띄우기에 오히려 반발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도 “비건 부장관이 균형 있는 접근이라고 언급했지만 그건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수반된 협상을 의미한다”며 “미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북한과 타협점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외교가에서는 미국이 북한의 큰 반발이 예상되는 8월 한미 연합훈련 축소 및 취소를 통해 북한을 관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실제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은 전날 긴급 회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건 부장관의 방한에 맞춰 한미 군 수뇌부가 회동하면서 8월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 문제를 논의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사망 26주기를 즈음해 김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8일 보도했다. 참배에는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김재룡 내각 총리 등 고위인사들이 수행했다./조선중앙TV 화면 캡처=연합뉴스
한편 김 위원장은 별도의 대미 메시지 없이 김일성 주석 26주기를 맞아 선대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