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처럼 보호 받는 승진이 싫어 선택한 'N잡러' 인생

[김동하 한성대 교수]
기자에서 영화 투자자, 대학 교수까지 그가 ’N잡러‘ 삶을 선택한 이유


매월 말 계좌에 ‘따박따박’ 찍히는 급여, 보통 이상만 하면 자연스럽게 올라 가는 조직 내 지위. 직장인들에게 이 둘은 마약과도 같다. 매일 업무에, 사람에 치여 퇴사나 이직을 고민하다가도 이 마약은 ‘그래도 회사 안이 밖보다는 따뜻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확실성을 수반하는 도전을 피하고, 기존 것을 지키면서 안정을 택하라고 강요한다. 김동하 한성대 교수는 이런 공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경제지 기자로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딛은 이후 엔터테인먼트 회사 임원, 영화 제작 및 투자자, 작가, 대학교수까지 'N잡러'의 삶을 살고 있다. 남들은 한번 갖기도 어려운 직업을 계속 바꿔나며 도전하는 이유는 뭘까. 라이프점프가 한성대 연구실이 아닌, 그가 사외 이사로 있는 이태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 직업이 다양하다. 회사를 그만 둘 때 두려움은 없었나


“없다면 거짓말이다. 난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다. 그래서 진학과 겸임교수, 시간강사 등을 포함한 겸직을 활용했다.


- 퇴사 후 새 도전을 준비하는 직장인들이 참고할 만한 얘기인 것 같다.


“그렇다. 지금까지 직업을 네 번 바꿨는데, 겸직을 활용했다. 단절을 통한 이직은 권하고 싶지 않다. 기존 직장과 새 직장을 징검다리처럼 이어가야 한다. 현 직장을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고, 돈을 투자해 이직을 준비하는 것도 넓게 보면 겸직으로 볼 수 있다.”


- 언론사가 첫 직장이라고 들었다. 주로 뭘 취재했나.


“경제지에서 10년 정도 일했다. 그 가운데 7년을 증권부 소속 기자로 자본시장을 취재했다. 당시 ‘네이키드 코스닥’이라는 기명 칼럼을 썼다. 책임감도 느꼈고, 공부도 많이 했다. 글 쓰는걸 워낙 좋아해 책도 여러 권(코스닥 비밀노트, 투자플랜 B) 냈다. 거래소 공시부, 검찰 금조부에 내 책이 필독서로 지정됐다. 검사들과 수사관들을 모아 놓고 증권 범죄와 관련한 세미나를 열었는데, 내가 강연자로 나섰다."




- 검사와 수사관을 대상으로 강연할 정도면 증권부 기자로 인정받은 건데, 왜 그만둔 건가


“물론 보람은 있었다. 그런데 수사관들 앞에서 강연하고 난 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분야에서 정점을 찍었구나’ 라고. 기자생활 10년이 넘으니 매너리즘도 찾아왔다. 처음엔 2년 정도 밖에 나가서 공부한 뒤 다시 편집국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그 즈음 내게 이직 제안이 왔다. 평소 콘텐츠 쪽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도전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 어떤 업무였나.


“회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로 가게 됐다. 당시 기자가 회사의 재무책임자로 가는 건 이례적이었다. 증권부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쌓은 전문성을 회사가 좋게 봐준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벤처캐피탈 업계에도 발을 디디게 됐다.


- 겸직을 한 건가.


“그렇다. 문화 콘텐츠 펀드 운영사에서 상무 이사,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벤처투자업계에 몸을 담았다. 투자 업무를 왕성하게 하지 못했지만, 회수 일을 하면서 업계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영화 제작, 투자자로도 활동 중인 걸로 알고 있다. 벤처 캐피탈 경력이 자연스럽게 확장된 건가.


“맞다. 언론사에서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넘어왔고, 이후 문화콘텐츠 관련 모태펀드를 운영하다 보니 영화 제작이나 투자와 관련된 일을 많이 하게 됐다. 또 내 스스로가 영화를 좋아한다. 아직 입봉을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 시나리오도 썼다(웃음)"


- 어떤 영화들에 투자했나.


“문화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면서 국내의 한 대형 투자배급사와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그 투자 배급사가 상업 영화에 메인으로 투자하고 남은 공간이 생기면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부분 투자로 들어갔다. 내 영화 투자 법인이 따로 있다. 첫 영화는 ‘군함도’였는데, 기대했던 것 만큼 수익을 거두진 못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 ‘7년의 밤‘, ’PMC, 더벙커‘에도 투자했지만 성과가 좋은 건 아니었다.(웃음)"


- 흥행에 실패한 영화만 말씀하신 것 같다. 대박 난 영화도 있지 않나.


“부분 투자했던 영화들이 연달아 성과가 좋지 못했다.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극한직업’이란 영화의 시나리오를 접하게 됐다.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뭔가 통쾌하게 풀릴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취재해 보니 촬영장 분위기도 좋았다. 투자 룸을 늘리려고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잘 됐다. 최근에 투자한 '기생충'과 '엑시트'에서도 괜찮은 투자 수익을 올렸다.


- 현재 중소 영화 배급사 ‘리틀빅픽쳐스’의 주요 주주다. 리틀빅픽쳐스에 대해 설명해달라.


“2013년 설립된 중소 연합사들의 연합 배급사다. 창작자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배급사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작품성이 있어도 자본력이 부족해서 극장에 걸리지 못하는 영화들을 배급하겠다는 명분이 마음에 들었다. 2016년부터 참여하게 됐다. ‘미쓰백’, ‘아이캔스피크’, ‘사냥의 시간’, '저산너머', '소리꾼' 등 좋은 영화지만 상업성 중심으로 만들지 않아 대형 배급사들이 맡지 않는 영화들이 우리의 손을 거쳐 관객들을 만났다."





- 전임교수로 활동 중인데.


“교수가 돼 강단에 꼭 서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다. 다만 평소에 여러 분야를 공부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속해 있는 산업을 분석하고 글로 정리했다. 교수라는 직업도 그런 연장선에서 갖게 된 거다. 2014년 성균관대에 문화융합대학원이 생길 때 창립멤버로 합류해서 2년 정도 겸임교수를 했다. 한성대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2년간 창업보육센터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 기자에서 기업 CFO, 벤처캐피털 임원, 영화제작 투자자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소위 ‘N잡러’의 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솔직히 이야기하면 경제적 동기다. 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다는 욕구가 늘 있었다. 항상 더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이 아니라면, 이해 상충의 문제가 없다면 늘 도전하고 그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 40대 중반의 나이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다. 예전 동료나 친구들이 부러워할 것 같은데


“그렇다. 예전 동료나 친구들을 만나면 불안감을 많이 느낀다. 승진은 했는데 언제 잘릴지 모를 불안감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조직에서 승진하는 게 꼭 일을 잘해서만이 아니다. 능력 외에 정치력도 필요하다. 뒤집어보면 조직에서 승진은 권리로서 보호받는 측면이 강하다. 큰 실수 하지 않고 보통 이상만 가면 다들 승진하지 않나. 난 그런게 싫었다. 자격이나 권리로서 보호받는 승진은 경쟁력이 없다. 그런 방식으로 조직에서 승진해서 40대 중후반의 나이를 맞는다면 회사 밖으로 나오기도 어렵다."


- 궁극적인 목표가 뭔가. 혹시 또 다른 직업을 꿈꾸고 있는 것이 있나.


“있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거다. 기자는 그만뒀지만 업계를 분석하고 글을 쓰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 난 글쟁이다. 지금도 계속 작업중이다.(웃음)"



/서민우기자 ingaghi@lifejum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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