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물안개공원은 경기 광주8경 중 2경의 자리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취재차 방문한 경기도 광주는 미세먼지에 더해 하늘까지 잔뜩 찌푸려 있었다. 몇몇 공원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출입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남한산성에 올라 사진을 여러 컷 찍었는데 집에 가서 살펴보니 쓸 만한 것이 없었다.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다가 며칠 후 새벽에 눈을 떠보니 모처럼 별이 초롱초롱했다. 세수도 생략하고 부스스한 머리에 야구모자를 눌러 쓴 후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다시 광주로 향했다. 다행히 출입을 제한하던 테이프도 없어졌고 물안개공원은 산을 넘어온 아침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다.
팔당물안개공원은 광주8경 중 2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경이라는 숫자가 아름다움의 순서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팔당댐 인근에 자리 잡은 광활한 호수가 공원과 어우러진 풍광은 한 폭의 그림 같다. 물안개공원으로 들어서 다리를 건너 섬으로 들어서면 그 안에는 귀여섬 산책코스가 있다. 섬 안에는 갈대억새들판, 노을언덕, 중앙광장, 바람들판, 야생화들판, 코스모스길, 희망의 숲, 다목적광장 등이 차례로 펼쳐지며 길을 따라 양쪽으로 메타세쿼이아가 솟아 있다. 각각의 장소들은 저마다의 이름처럼 특색이 있는데 면적이 상당히 넓어 공원 입구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둘러보는 것도 방법이다. 섬 안에는 곳곳에 꽃들이 식재돼 있어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조선시대 광주 일대에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산재했었다. 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사옹원(司饔院) 분원이 남종면 분원리에 있었는데 이곳이 물안개공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03년 개관한 분원백자관은 폐교된 분원초등학교를 새로 단장해 조선시대 관영사기의 변천과 도자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경안천 일대는 지난 1973년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농지와 저지대가 물에 잠겨 습지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이곳은 지금 수생식물의 천국이다.
분원백자관을 나와 광주 시내 쪽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잠시 후 오른쪽으로 경안습지생태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름을 앞둔 습지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초록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경안천 일대는 1973년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농지와 저지대가 물에 잠겨 습지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이곳은 지금 수생식물의 천국이다. 이후 조성된 밀림과 늪에 철새와 텃새가 둥지를 틀었고 지금은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는 철새들의 중간 쉼터가 됐다. 공원 습지에 난 데크길로 접어들어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난간에는 ‘고니가 서식하는 곳이니 조용히 관찰하시고 소음을 내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철새들이 머무는 철이 아니다. 철새는 11월 말부터 모여들기 시작해 3월까지 머물다 4월이면 다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저곳에서 고향을 버리고 정착해 텃새가 된 오리들이 한두 마리씩 유영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있는 허난설헌의 묘.
광주에는 여러 사적지가 있는데 이 근처에도 들러볼 만한 곳이 있다. 다름 아닌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의 묘지다. 허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본명은 초희, 자는 경번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조선시대 반가의 규수들조차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이가 드물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름은 물론이고 자와 호까지 가졌던 허난설헌의 집안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가풍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첫 부인 청주 한씨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 김씨 광철의 딸과 혼인해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는데 자녀들은 모두 문재가 출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허난설헌은 용모까지 아름다웠고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 김씨 성립과 혼인했으나 부부생활은 원만하지 못했고 고부간 사이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전염병으로 어린 남매를 잃은 뒤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했다. 설상가상으로 친정아버지와 오빠가 옥사를 겪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을 가는 비극이 겹친 끝에 허난설헌은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 세상을 떠나 신선이 되고 싶은 내용을 담은 시가 128수나 되는 것으로 보아 자유분방한 그의 사고가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문화에 억눌렸음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의 묘 앞에는 앞세운 두 남매의 묘가 있고 비문에는 그가 남긴 시가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지난해 잃은 딸과 / 올해에 여읜 아들 / 울며 울며 묻은 흙이 / 두 무덤으로 마주 섰네 / 태양 숲엔 소슬바람 / 송추(松楸)에는 귀화(鬼火)도 밝다 / 지전으로 네 혼 불러 / 무덤 앞에 술 붓는다 / 너희 형제 혼은 남아 / 밤이면 따라 놀지 / 이 뱃속 어린 생명 / 또 낳아 잘 자랄까 / 어지러운 황태사(黃台詞) / 피울음에 목이 멘다.
/글·사진(경기 광주)=우현석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