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의 종교재판중에서 가장 악명 높던 스페인 종교재판을 통한 화형 장면. 유대인과 무슬림,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주로 당했다./위키피디아
1834년 7월 15일, 스페인 전역에서 종교재판소(the Holy Office of the Inquisition)가 문을 닫았다. 1478년 설립된 지 356년 만이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소 중에서도 스페인 종교 재판소는 가장 악명 높았다. 프랑스에서 이단 혐의로 구금된 한 성직자가 꿋꿋한 태도로 죄목을 부인하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로 보내겠다’는 위협에 겁먹어 없는 죄까지 털어놓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수백 개의 창날이 박힌 작은 상자인 ‘올드 아이언 메이드(old iron maid)’라는 고문 장치에 들어가면 결말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고 한다. 자백하거나 죽거나.
애초부터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다른 곳과 달랐다. 일단 출발이 늦다. 간헐적으로 치러지던 종교재판이 처음 생긴 시기는 1233년. 남부 프랑스에서 세를 넓혀가는 카타리파(알비파·비잔틴 제국에서 박해를 받아 유럽으로 이주한 기독교의 분파로 이원론과 영지주의, 극단적 금욕생활을 강조해 이단으로 몰렸다)를 처단하기 위해서다. 알비십자군(1209~1229)을 일으켜 카타리파 신도 20만 명 이상을 학살하고도 근절되지 않자 교회는 세 가지 대책을 새로 내놓았다. 설교 강화와 수도회 신설, 그리고 종교재판. 초기의 종교재판은 알비파처럼 청빈과 순결, 금욕을 강조한 도미니크 수도회가 맡았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의 왕자 페르디난도 2세 간 혼인(1469)으로 형성된 스페인 연합왕국은 1478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청원해 종교재판소를 열었다. 심판은 교회가 아니라 스페인 왕실이 직접 맡았다.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이 여전히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스페인은 종교재판을 유대인과 무슬림을 솎아내고 북유럽 신교도의 유입을 막는데 써먹었다. 개종 안 하면 내쫓고 가짜로 개종하면 종교재판으로 처단해버렸다.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절 가톨릭과 유대인,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스페인 지역은 ‘신앙 때문에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희생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화형만 3만 1,912명이며 전체 희생자가 30만 명 이상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희생자가 20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과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숫자’라는 반론이 상존한다. ‘스페인의 종교재판 12만 5,000여 건 가운데 사형 판결은 1.8%(2.250명)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통계를 떠나 종교의 이름을 빌린 재판이 반인간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사람을 구분해 차별하고 굴종과 죽음까지 강요하던 악행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졌을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