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럽연합(EU)이 사상 처음으로 여성 수장을 맞이했다. 독일의 첫 여성 국방장관 출신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이다.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의 모국인 독일에서는 여성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16년째 독일 국정을 이끌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최근 제1야당 국민당 대표로 주디스 콜린스 의원이 당선됐다. 콜린스는 오는 9월 현직 여성 총리 저신다 아던이 이끄는 집권 노동당에 맞서 총선을 치르게 된다.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일본에서도 4년 전 여성 최초의 도쿄도지사가 탄생했고, 한국은 이미 여성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배출했다.
이런 변화에 전 세계 많은 남성들은 ‘이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평등을 외치는 여성들을 향해 ‘차별받는다는 근거를 대라’고 서슴없이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공한 여성 정치인은 여전히 극소수다.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신간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평등한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제시하는 차별의 근거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책을 통해 여성들이 그간 어떤 방식으로 소외되고, 차별 받아 왔는지를 낱낱이 설명하고, 현재도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이 표준이 되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랫동안 남성을 인간 표준으로 두고 만들어온 결과물이다. 수천 년 동안 남성이 ‘집 밖의 삶’을 주도했던 세상에서 정치, 경제, 도시계획, 의학, 과학, 교육 등 사회 구조 전반은 여성 데이터를 배제한 채 만들어졌다. 인간의 절반인 여성 데이터가 빠져 있으니 통계 오류가 나타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누적된 통계 오류의 피해는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여성 심장마비 환자들은 남성보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많다. 치료 중 부작용을 겪는 사례도 더 많다. 심장마비 진단과 치료가 남성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여성이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은 남성의 2배다. 여성들은 에어컨이 가동되는 표준 사무실에서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힘들어한다. 표준 온도가 몸무게 70㎏인 40세 남성의 기초 대사율을 기준으로 정해진 탓이다.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여성이 중상을 입을 확률은 47%나 높다. 자동차 충돌 시험에 177㎝, 76㎏의 남성 인형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업과 대학에서 시행하는 성과 중심 업무평가제는 ‘돌볼 대상이 없는’ 직원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돌봄 노동은 여성의 몫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오늘날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개발도상국과 저개발 국가에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성 평등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과 태도는 현격히 달라졌다. 다만 수천 년 ‘남성 디폴트’ 설계로 인해 남녀 모두 인식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오류를 함께 수정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여성 데이터 공백 문제는 또 다른 신간 ‘우리의 더 나은 반쪽’에서도 집중적으로 다뤄진다. 책의 저자는 세계적인 유전학자이자 의사로서 이미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샤론 모알렘이다. 그 역시 “산부인과 외의 분야에서 우리가 혜택을 입고 있는 현대의학의 놀라운 발전은 거의 전적으로 남성 참여자, 수컷 실험동물 그리고 남성의 조직 및 세포 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암컷 실험동물과 여성 조직 및 세포가 배제됨으로써 생겨난 구멍으로 인해 의사들은 여성 환자에게 처방할 약물의 적정 투여량이나 치료법을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데이터 공백이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X염색체에 대한 연구 부족과 X 염색체에 부정적인 현대의학의 보수적 관점은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오래 산다. 최근 코로나 19로 인한 사망자도 남성이 더 많다. 여성은 발달장애를 겪을 확률이 남성보다 낮고 남성보다 100배나 다양한 색상을 볼 수 있다. 저자는 20여 년 연구 결과 2개의 X 염색체를 가진 여성은 유전학적으로 선택지를 가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성도 남성처럼 하나의 X염색체를 이용한다고 여겨졌지만, 신체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리면 2개의 X염색체가 선택과 세포 협력을 한다는 걸 알아냈다.
저자가 여성 데이터의 의학적 필요성과 X염색체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건 남녀 대결에서 여성을 편들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류 절반에 대한 데이터가 누락 된 채 산출된 의학적 결과물은 남녀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 그리고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져야 인류 전체가 더 건강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