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우 송환 불허’ 후폭풍…“이래서 사법부에 분노한다”

시민들이 지난 10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앞에서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사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6일 법원이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2V)’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불허 결정을 내린 판사를 규탄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50만명 넘게 서명했고, 시민들은 길거리로 나와 집회 등 집단행동도 불사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성폭력 관련 판결들이 재조명되면서 사법부의 ‘성(性)인지 감수성’이 다시금 도마에 오르는 형국이다. 이번 기회에 법관에 대한 민주적 견제 강화를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송환 불허 판사 규탄 청원에 50만명 동의…집회 등 집단행동도
16일 기준 강영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인원은 50만9,000명을 넘고 있다. 청원이 한 달간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책임 있는 당국자의 답변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청원이 답변 요건을 충족하기까지는 단 10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앞서 지난 6일 강 판사가 이끄는 재판부는 손씨가 미국에 가면 현재 진행 중인 W2V 관련 수사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손씨의 송환을 불허했다. 이에 시민들은 서울고법 앞에서 연일 사법부 규탄 집회를 열고 국회의원들에게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단심제로 돼 있는 범죄인 인도를 재심제로 바꾸는 내용) 통과를 촉구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집단행동에까지 나섰다.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인 손정우씨가 지난 6일 법원의 미국 송환 불허 결정으로 석방된 뒤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연합뉴스

10세 아동 성폭행범이 고작 징역 3년?…들끓는 시민사회 여론
성범죄 판결을 내린 특정 판사의 이름이 명시된 국민청원에 20만명 이상 동의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3월에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의 담당 판사를 교체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당시 n번방 사건으로 기소된 한 피고인의 재판을 오덕식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가 맡았는데 오 판사가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판결을 내린 전이 있으니 해당 사건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당시 청원에는 46만6,900명이 동의했다. 지난해 6월 오 판사는 가수 고 구하라씨의 전 남자친구 최종범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가해자 중심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최씨는 구씨의 신체를 불법촬영하고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 2일 2심이 있었지만 검찰이 항고에 나서며 최종 판단은 대법원에서 이뤄질 전망이다.


지난해 6월에는 서울고법 형사9부(한규현 부장판사)가 10세 아동에게 술을 먹이고 성폭행해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30대 남성을 징역 3년으로 감형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한 판사를 파면해달라는 국민청원에는 24만여 명이 동의했다. 재판부는 ‘제시된 증거만으로는 강간의 구성요건인 폭행과 협박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다’고 해명했지만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판결이라는 비판이 법조계와 시민단체에서 끊이지 않았다.

성(性)인지 감수성 부족 판결…“사법부 견제장치 필요” 목소리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법관 견제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의 법 감정과 동떨어진 판결이 계속해서 나오는데도 사법부에 대한 견제장치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이유에서다.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는 “법관징계법으로 내릴 수 있는 법관징계의 최대치조차 정직 1년에 불과하다”며 “법관 탄핵도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는데 이렇게까지 독립성만 유지하는 게 지금 상황에 맞는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것은 딱 두 번뿐이지만 모두 부결되거나 기한 경과로 자동 폐기됐다. 반면 미국은 1803년부터 2010년까지 총 10명의 법관이 탄핵되거나 탄핵재판 중 사임했다. 일본은 국민도 법관소추를 요구할 수 있어 1948년부터 2018년까지 제기된 요구 건수만 2만675건에 달한다.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을 제고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권김 연구자는 “캐나다에서는 판사가 승진하려면 성인지 감수성과 관련한 의무교육을 수강해야 한다”며 “유독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일부 법관들의 인식이 사회 전체 인식과 동떨어져 있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캐나다에선 로빈 캠프 연방법원 판사가 2014년 성폭행 사건 재판에서 피해자에게 “왜 무릎을 붙이고 있지 않았냐”고 말해 파면된 후 법관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김태영기자 young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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