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덴쇼 소년사절단

1590년, 8년5개월의 유럽 방문

교황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하는 소년사절단. 이들은 온 유럽의 환대를 받으며 일본에 대한 인식을 깊게 새겨 놓았다./위키피디아

1590년 7월 21일 나가사키. 이토 만쇼(21세) 일행이 항구에 발을 들였다. 8년 5개월 만의 귀국. 출발할 때 13~14세였던 소년들은 청년으로 성장해 일본 땅을 다시 밟았다. 이들의 명칭은 덴쇼(天正) 소년사절단. 일본 포교 성과를 알리고 싶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규수 지방의 기리스탄(기독교도) 다이묘(영주) 3명이 유럽에 보낸 사절이다. 출발 당시 사절단의 인원은 13명. 일본인 사절 7명은 나이가 어렸다. 성인 지도역(수사) 1명을 제외하고는 정사와 부사, 인쇄 견습공의 나이가 모두 13~14세였다.


일본인 소년사절단은 2년 반 동안 태평양과 인도양,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 리스본에 도착,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국왕을 만났다. 교황 그레고리 13세(그레고리 역법을 도입 장본인)까지 소년들을 반겼다. 교황의 선종 직후 새로운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대관식에도 초대될 만큼 소년 사절단은 온 유럽의 환대를 받았다. 가톨릭은 그럴만했다. 신교 세력이 반기를 드는 마당에 ‘황금의 나라, 지팡구(마르크 폴로 동방견문록)’로만 인식했던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고무됐다.

소년 사절단이 방문하지 않았던 신교 지역에서도 일본 붐이 일었다. 1585년 유럽 전역에서 일본 관련 서적 48종이 쏟아져 나왔다. 1620년에도 중급 무사 하세쿠라 쓰네나가 일행이 6년 11개월 일정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 더욱이 이들이 탄 500t급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는 일본이 자체 건조한 세 번째 갤리언 선박이었다. ‘일본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는 인식이 이때부터 생겼다. 교류의 충격은 일본도 마찬가지.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소년사절단을 통해 들어왔다. 1570년 판 세계 지도 ‘지구의 무대’도 반입돼 권력자와 식자층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도를 보고 아시아를 공동 운영하자고 스페인에 제안했다. 스페인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가운데 벌인 게 조선을 통한 명나라 침공(임진왜란). 소년사절단은 일본이 중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세계와 교류하는 시발점이었다. 일본의 특이점은 정체성(identity). 이역만리를 항해하고 죽음까지 불사했던 종교도 어느새 힘을 잃고 ‘일본’이라는 일체감과 자긍심만 남았다. ‘쌀과 책을 구걸하는 왜구’로 여기던 일본이 세계를 공부할 때 조선은 뭘 했나. 요즘이라고 다를까. 중화 사대주의와 친미 사대주의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변변한 서점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일본을 비웃던 조선의 무지에서 우리는 자유로울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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