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오수환.. /권욱기자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가나 아뜰리에’. 여름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빛나는 건물의 맨 꼭대기 층에 오수환의 작업실이 있다. 후학을 가르치며 몸담았던 서울여대를 정년 퇴임하고 명예교수로 물러앉은 후로 그는 10년 넘게 매일 아침 이곳에 출근해 온종일 작업하다 해 질 녘에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유교적 성향이 강한 경남 진주의 유명 한학자 겸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1908~1991)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필묵을 가까이했고, 중국의 서예와 미술사 책들을 읽으며 안진경·왕희지·소동파 같은 거장들의 업적을 접했던 그다. 그림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삼을 생각을 한 적은 없었으나 평생 서예에 매진하는 부친과 주변 문인들의 긍정적인 영향이 그를 자연스럽게 예술가의 길로 이끌었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것이 1969년이었으니 벌써 50년째 화가로 살아왔다.
오수환은 캔버스에 유화라는 서양화 재료를 다루지만 서예적 붓질을 짐작하게 하는 동양적 ‘서체 추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작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기획한 서예 전시인 ‘미술관에 서(書):한국 근현대 서예전’에 그의 작품이 걸린 이유다. 서예적 필선이 조형적 아름다움을 낳은 작품들이다. 최초의 온라인 개막전시인 ‘미술관에 서’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발 빠른 대응과 독창적 예술세계로 해외 관람객 및 외신의 주목을 받았고 큐레이터와 함께한 전시투어 영상은 8만2,000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평소 글씨의 요소를 내 작업에 적용해 왔으니 서예와 현대미술을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출품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서양의 이성주의(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서양의 요소와 다르게 뻗어가는 요소로 서예의 방식을 택했어요. 서예는 극동지역인 한중일 만의 독특한 문화형식인데 1950~1960년대 서구 미술에서도 미국의 잭슨 폴록이나 독일의 한스 아르퉁, 프랑스의 앙드레 마송 등 상당한 작가들이 동양의 서예를 ‘인용’했죠.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그것을 극동의 서예가 서양의 분석주의에 대항할 요소가 된다는 뜻으로 이론적 뒷받침을 해줬고요.”
파랑·노랑·주황 등 선명한 색을 입은, 성인 남자의 키를 훨씬 웃도는 거대한 캔버스를 그의 크고 검은 붓질이 가로지른다. 고요가 깨지는 동시에 대화가 시작된다. 즉흥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몸짓인가 싶으면서도 자연의 순리를 따른 음악적 리듬이 감지된다. 당연함과 기묘함이 교차한다. 작업실 구석의 벽면에서 그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는 흰 스케치북이 새까매질 지경으로 반복해 그은 연필·펜 드로잉, 방향과 농도를 달리해가며 거듭 찍은 먹 자국, 수채 물감으로 붓질한 흔적과 색을 연구한 종이들이 잔뜩 붙어 있다. 일필휘지라 찬탄하는 호방한 붓질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흔적이다.
현대미술가 오수환이 경기 양주시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권욱기자
“한 장의 캔버스 그림을 위해 수백 장의 드로잉이 필요합니다. 당나라의 승려시인 황벽선사가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番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라 했지요. 뼛속까지 아리는 추위가 없었더라면 이토록 짙은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었겠냐고 묻는 그 시구처럼 연습을 통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언덕도, 산도 넘어갈 수 없죠. 예술가의 삶은 늘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마음입니다. 일종의 실험의식과 모험을 전제로 낭떠러지에서 한발 내디뎠을 때 비로소 뭔가가 발견되거든요. 그렇지 않고서는 작업을 진전시킬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연습이 중요하고, 수련과 충동의 연결 지점에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합니다.”
의도와 의식을 배제한 듯한 붓질이라 해서 반복과 연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련과 더불어 그가 강조하는 것은 체험이다. “오랫동안 다양한 요소들이 축적돼 작업을 이루는 것이니 문학인이든 화가든 음악가든 생활체험·인생체험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월남전에 참전한 이유를 헤아릴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전쟁을 테마로 작업하는 세계적 거장들이 많았어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전쟁이니까요. 오죽했으면 전쟁을 겪어봐야 화가가 되는 것인가 싶었을 정도로요. 대학 4학년이 되던 스물세 살에 입대했고 이등병 신분으로 월남에서 1년 3개월 정도 복무하고 돌아왔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좀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끝까지, 더 멀리까지 사유하지 않으면 뭔가를 얻어낼 수 없다는 것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결국 시간을 전제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이니 그 본질의 극단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깊이 있는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함께 새겼고요.”
온화한 인상만큼이나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것으로 여겨지는 그에게 전쟁의 경험은 격정적인 붓질이 나오는 동력이 됐다. 또 하나, 극심한 좌우 대립의 폐해를 목도한 그가 이념으로부터의 탈피를 결심한 계기이기도 했다. 오 화백은 1970년대 초반에 구상미술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내 추상으로 돌아섰고 평생 추상으로 내달렸다.
1980~1990년대에는 ‘곡신(谷神)’ 연작을 선보였다. 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곡신은 ‘골짜기의 신’을 뜻하며 비어 있는 곳인 듯하나 만물이 생동하는 생명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후 2000년대에는 ‘적막’과 ‘변화’ 시리즈를 전개했고 최근에는 과감한 색감이 두드러진 ‘대화’ 연작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미술가 오수환./권욱기자
오수환의 묵묵하면서도 먹먹한 붓질은 외국에서도 통했다.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 지역의 매그미술관으로 유명한 매그재단이 대표적이다. 20세기 유럽미술을 이끈 프랑스 매그갤러리가 기반인 이 재단은 샤갈, 마티스, 미로, 칸딘스키 등의 작품을 대규모로 소장하고 있다. 2000년대 초 매그재단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에서 작업한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갈 때마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썼던 작업실을 이용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편집증적 성격이 있던 자코메티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뼈만 남은 듯한 앙상한 인간상으로 실존주의를 보여줬다. 월남전 참전 후 추상화가로 자리매김한 오수환과 통하는 부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로 현대미술을 나누듯 이제는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듯합니다. 옛날 얘기하나 해드리죠.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경제인연합회에서 프랑스 철학자 기 소르망을 초청하고 몇몇 예술가를 함께 불러 강연회를 했습니다. 그때의 결론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예술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술가의 본질을 파고드는 태도로 접근하면 경제 위기도 넘길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코로나19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예술가들의 삶이 어떠한지, 예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 본성을 연구하면 해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술은 자기만을 위한 게 아니라 타인과 공유하고 남을 위하는 요소가 있고, 예술은 최소한의 물질로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작가가 물감과 붓통 옆에 나란히 놓인 벌집 조각들과 깃털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간다. “한동안 작업실 베란다에 자리 잡았던 큰 벌집의 흔적입니다. 깃털은 내가 퇴근한 후 집주인처럼 행세하는 황조롱이가 남긴 것이고요. 인간이 자연이 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 작업도 어떻게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일이고요. 코로나19는 그간 너무 방만하고 소비 위주였던 인간의 삶에 경종을 울려 성찰할 계기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반성할 수 있으면 그게 기회죠. 보름 동안 외출하지 못하는 것은 3년씩, 10년씩 토굴에 앉아 수도하는 수행자에 비한다면 별일 아닐 수 있거든요. 산책하듯 자연 속을 거닐다 보면 자유와 행복이 찾아옵니다.”
/양주=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