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특별한 직업이다. 학창 시절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의대에 진학하면 또다시 엄청난 수련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남자는 군 복무까지 감안하면 의사가 되기까지 12~13년이 걸린다. 얼마 전 종용한 케이블TV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레지던트들의 성장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며 큰 인기를 얻었지만, 현실 속 레지던트들은 드라마 속 이야기보다 몇 배 더 힘들 삶을 버텨내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의사는 우리 사회에서 법조인, 교수 등과 함께 대중에게 존경 받는 몇 안되는 직업 중 하나다. 전공 분야를 꾸준히 갈고 닦으면 풍요로운 삶도 보장된다. 젊은 시절 치열하게 경쟁하고, 공부한데 따른 보상 성격도 있다. 그런데 모든 의사들이 그런 건 아니다. 풍족한 삶 대신 의사가 된 이후에도 또 다른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 바로 닥터킨베인 김덕규 대표원장이다.
그는 의대에 가기 위해 대학시험(학력고사 전·후기 포함)을 무려 열 다섯 차례나 봤고, 남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한창 일할 나이인 서른 넷이 돼서야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늦깎이’ 의사인 만큼 안정된 삶에 대한 갈망이 클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페이닥터를 거쳐 병원을 개원한 이후에도 화장품과 바이오 회사를 잇따라 창업했다. 그에겐 사업도 궁극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아닌 ‘꿈’을 쫓으며 살고 있는 그의 삶이 너무 궁금했다. 인터뷰는 그가 대표 원장으로 있는 닥터킨베이 인천 본점에서 진행했다.
- 현재 닥터킨베인 대표원장이다. 닥터킨베인에 대해 설명해달라.
“페이닥터를 한 후 의사들과 동업해 병원을 개업했다. 하지만 잘 안됐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나만의 철학이 있는 병원을 운영하려고 2013년에 설립했다. 킨베인은 피부를 뜻하는 ‘스킨(Skin)’과 풍향계를 뜻하는 ‘베인(Vane)’의 합성어다. 피부의 방향성을 제시하겠다는 목표로 만든 피부·성형외과다.”
-피부 미용과 관련된 병원들은 주로 강남에 있다. 지리 상 인천의 끝인 검단에 병원을 설립한 이유가 있나.
“앞서 얘기했듯이 동업에 문제가 생겨 돈을 많이 잃었다. 돈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카드 5개로 병원을 설립했다. 7년 전 병원을 개원했을 땐 이곳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건물주가 병원이 건물에 들어오면 건물 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생각하고 첫 6개월 간 임대료를 받지 않겠다고 해서 들어오게 됐다. 의대를 다니기 전에 타 대학 항공우주학과를 다녔다. 당시 후배들이 항공기 조종사로 일하며 이곳에 살았는데, 추천해줬다.
처음엔 주변에서 ‘왜, 강남이 아니고, 거기냐’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생각을 바꾸니 달라졌다. 여기가 인천의 끝은 맞지만 김포와 일산과도 맞닿아 있었다. 또 내가 개발한 피부 시술법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시술을 하면 보통 5~10살 정도는 어려 보이게 할 수 있다. 생각해봐라. 맛있는 식당은 가격이 비싸고, 산골에 위치해도 사람들이 찾아서 간다. 그때 생각했다. ‘아, 먹는 것도 이렇게 멀리서 찾아오는데, 내 피부에 시술하는 건 오죽하겠냐. 잘 한다는 소문만 나면 승산이 있겠다.’ 라고 말이다. 그럼 병원이 위치한 검단은 인천의 끝이 아니라, 인천, 김포, 일산, 부천의 중심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
- 실제로 외부에서 오는 환자들이 많나.
“그렇다. 이 지역은 크지 않아서 병원 손님의 80% 이상이 타 지역에서 온 환자들이다. 멀리선 제주도에서도 온다. 거제도, 전주, 대구, 울산에서 온 환자들도 있다.”
- 그들이 닥터킨베인을 찾은 이유는 뭔가
“가장 기본은 실력이다. 내가 잘하는 게 있어야 확실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엔 제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자세하게 환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세심하게 체크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한 환자에게 30분 넘게 설명하고 있으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 물론 짜증날 수 있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환자에게도 똑같이 30분 이상 설명해준다. 충분히 설명하고 시술 결과도 좋으니 환자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우리 병원을 한 번도 오지 않은 환자는 있을 수도 있어도, 한 번만 오는 환자는 없다. ”
- 병원을 경영하는 방식이 독특하다고 들었다.
“사람에 투자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닥터킨베인을 설립했다. 신용카드 5개로 만든 회사다. 보통 병원을 설립해서 자리를 잡으려면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첫 달부터 자금이 부족했다. 매출이 나오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웃음) 페이닥터 시절 때 같이 일했던 직원들이 병원을 설립할 때 합류해줘서 빨리 셋팅할 수 있었고, 그 후에 들어온 직원들도 열심히 해준 결과다. 그때 배운 게 ‘아 결국 일이라는 게 사람이 하는 거구나’ 를 느꼈다. 지금 직원이 20명 정도 되는데, 수익을 인센티브 형태로 직원들과 나누려고 노력한다. 직원들이 신바람 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매출은 자동으로 따라온다.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줄 때 ‘줄까 말까’ 고민하는 것보다 ‘줄 때 확실히 주는’ 것이 효과가 더 크다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웠다. ”
- 코로나 여파로 병원 매출이 줄었을 텐데, 직원 인센티브도 줄 거 같은데.
“물론 그렇다. 인센티브는 매출과 연동돼 있다. 감소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에 투자한다는 내 원칙은 그대로다. 이번 코로나 국면에서 직원들의 줄어든 인센티브를 보전하기 위해 기본급을 모두 올려줬다.”
- 직원들이 놀라지 않았나
“아마 매출이 줄어드니 인센티브도 당연히 쪼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기본급을 올려주니 직원들도 동기부여가 되고 열심히 하더라. 매출도 다시 상승하고 있다. 직원들의 기본급을 올려준 것이 저한테는 작은 결정일 수 있지만 직원들에겐 크더라. 직원들을 생각하고 배려해주면 나중에 결국 수 배 이상 커져서 나에게 돌아온다고 믿는다. ”
- 본업 외에 의약 제조품 회사의 대표로도 활동 중이다. 설명해달라.
“제론 바이오라는 회사를 창업해서 경영하고 있다.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시술하면서 늘 ‘갈증’에 시달렸다. 기존에 있는 의약품만으로 환자의 피부질환을 치료하거나, 좀 더 젊게 보이고 싶어하는 니즈를 충족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재생물질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론 바이오라는 회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 어떤 의약품을 만드는 것인가.
“연어에서 피디알엔(PDRN)이라는 재생물질을 추출해 의약품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재생물질을 잘 활용하면 각종 염증 질환 치료와 노화 방지에 도움이 된다. 의학적 관점에서 재생이란 쉽게 말해 상처를 아물게 하는 거다. 대부분 질환은 염증에서 시작된다. 결막염, 접촉성 피부염, 알러지, 관절염 등이 모두 염증의 한 종류다. 결국 염증을 어떻게 치료하느냐에 따라 질환 치료 효과도 높아진다. PDRN은 재생 효과가 탁월한 물질이다. 하지만 줄기세포 배양 방식을 통한 추출은 비용도 많이 들고 대량생산이 어렵다. 제론 바이오는 이 PDRN의 효과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 본업을 유지하기도 바쁠텐데, 어떻게 창업을 하게 됐나.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왔다. 저희 병원에 핀란드 대학의 교수님이 시술을 받으러 온 적이 있다. 한국계 핀란드 분이신데 처음엔 동네 아줌마인 줄 알았다.(웃음) 시술을 받고 나가시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명함을 주고 갔는데 그게 인연이 됐다.
- PDRN 물질을 개발하는데 핀란드 교수가 도움을 줬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병원을 운영하면서 기존 약물로는 좀 한계를 느꼈다. 유럽에서 PDRN 물질을 사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효과가 좋았다. 좀 더 업그레이드해서 직접 의약품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그 교수님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는데 해답을 주셨다. 스리랑카에 어류 관련 전문가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도움도 받았다.”
- 병원이 자리 잡으면서 현상 유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을 텐데. 왜 사업가의 길을 걷는 건가.
“처음부터 사업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기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환자들에게 좋은 물질을 개발하고 싶다는 의욕이 더 컸다. 그렇게 단계를 밟아오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 주변의 만류도 있었을 것 같다. 두려움은 없었나.
“두렵진 않았다. 창업이 이렇게 힘들다는 걸 모르고 시작했다. 솔직히 다시 하라면 못할 거다. (웃음) 어떻게 보면 순수했던 것 같다. 청사진을 갖고 비지니스를 키워보겠다는 생각보다 환자의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좋은 물질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운이 좋은 거다. 제약산업이 특성상 많은 자금과 시간이 든다. 중간 중간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조언도 받고 투자도 받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경제적 안정보다, 본인의 꿈을 실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편이다. 난 지금도 월세에 산다.”
- 병원 대표 원장이자 바이오 기업의 CEO가 월세에 산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병원서 벌어들인 수익 중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남은 돈의 대부분을 회사에 투자하고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제약산업이 비용이 많이 드는 산업이다. 아내와 우스갯 소리로 ‘기업에 투자하지 않고, 차곡차곡 돈을 모았으면 지금 세 들어 있는 이 병원이 우리 건물이 될 수도 있었겠다’고 한 적이 있다. 노후를 걱정했었다면 바이오 회사를 창업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점에선 내 꿈을 믿고 지지해 주는 아내와 세 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다행히 회사에서 개발하는 재생물질에 대해 해외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유럽은 물론 중국, 일본,베트남 쪽에서 연락이 오고 있다. 월세를 전세로 바꾸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웃음)"
- 의사 김덕규로 돌아가 보자. 남들보다 늦게 의사가 됐다.
“그렇다. 스물 여덟에 의대에 입학했다. 대학시험만 학력고사 전후기를 합쳐 열댓번 본 거 같다. 심지어 군 생활 하면서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당시 신문에 나온 모의고사 문제를 오려서 풀었던 기억이 있다.”
- 포기할 법도 한데, 의지가 대단하다
“나이도 있고, 시험을 계속 봐도 안되니 심각하게 의대 입시를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 때 친한 시골 친구의 격려로 마음을 돌렸다. 시골(강원도 영월) 친구인데 같이 삼수를 하고, 한의대에 갔다. 난 의대 입학에 실패했지만 그 친구는 같이 수험생활을 하며 나를 고마워했다. 군대를 전역 후 의대 입시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도와줄테니 한번 더 해보라고 했다. 마음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고 했는데, 그게 된 거다. 그 경험을 통해 내 가치관도 바뀌었다.”
- 어떻게 바뀌었었나.
“만약 내가 의대 입학에 실패했다면, 제 자식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을 거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게 있다. 너가 잘하는 다른걸 찾으면 된다.’ 하지만 의대에 들어가고 나서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너가 열심히 하면 길은 있다. 시간의 문제일 뿐,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열심히 해라. 반드시 된다.’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거다."
- 인간 승리다. 늦깍이 의대생으로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나.
“ 입학하기 전엔 걱정이 많았다. 여덟 살 아래 동생들과 수업을 같이 들어야 하니. 그런데 다행히 내가 의대에 입학했을 땐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도 꽤 있었다. 나이보다는 살인적인 인턴, 레지턴드 생활이 더 힘들었다.(웃음)"
-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큰 인기를 얻었다.
“현실 속 인턴, 레지던트의 삶이 드라마보다 4~5배 정도 더 힘들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의 주 120~150시간 일했으니깐.”
- 의사로서 힘들었던 수련 과정이, 사업하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은 없나.
“물론 있다. 난 의대에 입학하기 전에도 재수, 삼수, 사수하면서 인내심을 키웠다.(웃음) 왠만한 충격엔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다. 강원도 영월이 고향인데, 우직함이라고나 할가. 시골 특유의 성향이 있다."
- 의사이자 사업가 김덕규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재단을 만들고 싶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도, 현재 사업을 키워 나가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재단 설립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인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어도 죽는 순간 무덤에 가져갈 순 없다. 레지던트로 있을 때 암 환자들을 많이 봤다. 운명을 달리하는 순간 자식들의 표정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평소 남들에게 배려하고, 자식에 애정을 쏟은 분은 눈을 감는 순간 자식들이 무척 슬퍼한다. 반면 엄청난 부를 갖고 있어도 돌아가시는 순간 자식들이 덤덤해 하는 분도 있었다. 돈 때문에 임종을 지키는 거지, 부모가 돌아가시는 거엔 큰 관심이 없는 거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피폐한 삶은 없어야 한다고 본다."
- 어떤 재단을 생각하는 건가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위한 재단이다. 요즘 아이들은 개인화 돼 있고 경쟁이 심해 정서적으로 메말라 있는 것 같다. 덴마크나 핀란드의 교육을 보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숲에서 뛰논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존감 높은,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제도적, 환경적으로 지원해주는 사회복지재단을 만들고 싶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오는데 버팀목이 되 준 어르신들을 지원하는 것도 하고싶다. ”
/서민우기자 ingaghi@lifejum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