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조선소에서는 낡은 배의 상처를 때우기 위한 역청이 끓고…(중략)…저 아래에서는 인간의 불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짙은 역청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 이탈리아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 제21곡 서두의 일부다. 지옥에서도 가장 아래인 9옥을 묘사하는데 베네치아의 조선소(Venetian Arsenal)를 인용한 것이다. 말 그대로 이 조선소에는 선거(船渠)뿐 아니라 무기공장과 화약고도 있었다. 단테에게 깊은 인상을 안겨준 이 조선소의 건조 능력은 약 100년 뒤 2배로 늘어났다. 증설 덕분이다.·
확충된 베네치아 조선소에 더욱 놀란 사람이 있다. 당대에는 단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분이 높았던 그는 누구일까. 한 달 가까이 체류한 베네치아를 떠날 때 이런 말을 남겼다. ‘베네치아 시민이 되고 싶다. 프랑스 왕이 아니라면.’ 전쟁으로 점령한 것도 아닌데 프랑스 왕 앙리 3세가 베네치아공화국에 있었던 이유는 귀로였기 때문이다. 앙리 3세의 당시 신분은 폴란드 국왕 겸 프랑스 왕위계승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 국왕으로 초빙(1572년)됐으나 2년여 뒤 형의 급서로 왕위를 물려받게 된 앙리 3세는 남몰래 궁전을 빠져나왔다. 귀국을 만류하는 귀족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신교 지배 지역을 피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거쳐 베네치아에 당도한 그는 최고의 의전을 받았다. 베네치아도 막대한 비용을 치렀으나 앙리 3세도 돈을 아낌없이 썼다. 유럽 최고 부자 메디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카트린 모후가 전해준 돈으로 베네치아 1년 치 예산 이상의 돈을 뿌렸다. 23세의 프랑스 왕위계승자는 1574년 7월24일 ‘국영 조선소’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봤다. 아침에 조립이 시작된 배가 저녁에 준공된 것이다. 당시 유럽 평균은 한 달에 한 척. 베네치아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 가지 비결이 있다.
우선 규모가 컸다. 앙리 3세 방문 2년 전 제3 조선소가 건설돼 규모가 단테 시절보다 2배 늘어났다. 두 번째는 집적화. 연관 산업을 모두 조선소 부근에 모았다. 세 번째는 이동조립공정. 운하를 따라 배가 움직이고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도구로 동일한 노동을 반복해 기술 숙련도와 생산속도를 끌어올렸다. 20세기의 발명품이라는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실은 15세기부터 가동됐던 셈이다. 한때 1만6,000여명이 일했다는 산업단지를 갖고도 베네치아는 왜 쇠망했을까. ‘바다의 도시 이야기’의 작자 시오노 나나미는 그 원인을 이렇게 꼽았다. ‘자만과 독점·특혜의 폐해.’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