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언론인→경제부총리→국회의원…'백상 장기영'이 남긴 교훈은[서울경제 창간 60년]

[창간 기획-본지 창업주 '백상 장기영'의 발자취]
한국銀 기틀 마련하고 국내 첫 '신용대출' 성사시킨 금융인
13년 경제연구 결과물로 '서울경제' 창간…언론혁신 일깨워
1964년엔 경제부총리 맡아 '탄탄한 경제성장' 건설 앞장
문화스포츠에도 큰 획…시대 앞서간 '페미니스트'이기도


금융인·언론인·체육인·정치인으로 살았던 백상 장기영. /서울경제DB

“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몸은 체육인이며, 피는 언론인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나의 얼굴이다.”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아이디어를 가졌다 하여 ‘일백 백(百)’ 자에 ‘생각 상(想)’ 자를 호로 쓴 백상 장기영(1916~1977년) 선생이 생전에 그린 자아상이다. 은행원으로 시작해 한국은행의 토대를 다진 금융인이요,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이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낸 체육인이면서 경제부총리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니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컴퓨터 달린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치밀함과 추진력을 겸비한 백상은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고 미답의 영역을 개척해낸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자 시대의 선구자였다. 서울경제 창간 6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그의 발자취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미증유의 혼돈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믿음직한 지표를 제시하기 충분하다.

지난 1916년 5월2일 지금의 서울시 한남동인 경기도 고양군 한지동에서 태어난 장기영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았다. 수재들만 모였다는 선린상업에서 늘 최상위권에 올라 졸업하던 1934년에는 ‘우등 졸업자’로 일간신문에 이름과 사진이 함께 실렸다. 서울대 상대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에 무시험 입학할 특전을 받았지만 가정형편 탓에 진학의 뜻을 접은 그는 지금으로 치면 거대 다국적 기업인 조선은행에 입사해 청진점에서 스무 살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발군의 인재였다. 1943년 당대의 경제학·사회학 이론에 케인스 이론을 접목한 논문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는 엘리트들이 집결한 조선은행 내부 공모에서 1등 상을 거머쥐었다.

이론에만 밝은 게 아니었다. 백상은 조선은행 최초의 ‘신용대출’을 밀어붙인 주인공이다. 태풍으로 배를 날린 선주가 필사적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는 것을 본 백상은 ‘폭풍우를 뚫고 배를 구하려 한밤중에 뛰어다니는 정신’을 높이 사 담보 없이 선뜻 대출을 권했다고 한다. 유례없는 신용대출을 받은 선주는 재기에 성공해 훗날 손꼽히는 재벌그룹을 이뤄냈다. 백상의 인재 중시와 사람 보는 안목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조선은행에서 국가 중앙은행으로 승격된 한국은행으로 적을 옮겨 조사부에 근무하던 시절에는 6·25전쟁으로 굶주린 인사들을 위한 전시(戰時) 신용대출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중요한 인재들은 본업을 중단하지 않고 전쟁통에서 살아남았다.

이 밖에도 한국은행 시절 백상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혜안은 금융계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해방 직후인 1948년 7월 조사부 차장 신분으로 발간한 ‘조선경제 연보’는 오늘날 한국은행이 발간하는 국민소득통계·국제수지통계·금융통계·기업경영분석·산업연관표의 원조가 됐다. 한국은행법과 은행법 제정에 대한 기여는 그 시기 백상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다만 낭중지추라 공만큼 적도 많았다. 한국은행 설립 1년 후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해 은행원으로서의 1막을 끝낸 그는 언론인으로서 인생의 2막을 열었다.


한 손에는 전화기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서류를 든 채 신문을 보고 있는 백상 장기영 선생. /서울경제DB

언론인으로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재정난에 빠진 조선일보였다. 1952년 4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2년간 부수 13배 신장의 기록을 이뤄냈다. 이후 타의에 의해 신문사를 나서면서 그는 젊은 조국에 걸맞은 새로운 언론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태양일보를 인수해 1954년 6월9일 창간한 한국일보는 뉴스의 가치에 의해 독자에게 인정받고 광고주에게서 광고 게재를 의뢰받는 상업지를 표방했기에 남달랐다.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설치하고 철야로 신문제작을 독려한 백상의 일화는 유명하다. 원탁회의부터 난상토론까지 기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아끼지 않았다. 그 자신도 문장가였다. 조사 ‘은·는’과 ‘이·가’가 어떻게 다른지를 기자들에게 설파했고 직접 사설도 썼다. ‘신문기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비롯해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이 바로 마감시간이다’ ‘신문은 비판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칭찬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등의 어록은 기자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1960년 8월1일 창간한 서울경제는 13년 숙고의 결과물이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1947년 초 그를 포함한 은행의 30대 실무책임자 8명이 결성한 ‘서울경제연구회’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모여 새로 태어난 조국의 경제에 대해 토론하며 생각을 키워갔다. 그렇게 10여년간 신중히 때를 기다린 백상은 오랜 동지들인 서울경제연구회의 제안으로 마침내 ‘서울경제’ 창간을 결정했다.

백상의 통찰력은 서울경제 지면에서도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백상은 창간 일주일 뒤부터 김포공항에 전담기자를 배치해 공항을 오가는 주요 인사들의 출국 일정, 해외업무 계획을 전하는 ‘경제인 왕래’라는 고정란을 서울경제 지면에 만들었다. 해외출장이 극히 드물던 시절, 누군가 비행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경영정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한국 언론에 항공기를 처음 도입한 것도 백상이었다. 항공부를 만들어 단발기와 쌍발기·헬리콥터를 사들였고 다양한 항공사진을 실어 지면의 질을 끌어올렸다. 5·16 직후 신문제작용 종이가 부족할 때는 몸소 서울과 부산을 하루 두 번씩 왕복하며 신문용지를 실어날랐고 수해로 배달이 불가능해지면 항공기로 신문을 싣고 가 학교 등의 옥상에 뿌렸다.

백상은 쓴소리여도 바른 소리를 고집했다. 1961년 칠레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정부가 공산권인 유고슬라비아 선수단의 방한과 우리 대표팀의 원정을 불허하자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던 그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백상의 범상치 않음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1966년 11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영접위원장으로 나선 장기영(가운데). /서울경제DB

실제 박 대통령은 경제이슈가 터질 때마다 “서울경제를 가져오라”고 했으니, 날카로운 분석과 정확한 예측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 식량난이 극심하던 1963년 8월 세계적인 곡물 부족 와중에 한국이 일본을 통해 캐나다산 밀가루 10만톤을 수입한 적이 있는데 이를 막후에서 성사시킨 이도 백상이었다. 공식 외교채널로도 해결할 수 없던 곡물 수입을 백상이 일본 내 인맥을 총동원해 이뤄낸 것이다.

이듬해인 1964년 5월11일 백상은 박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에 따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좀체 측근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박 대통령이 경제 분야만큼은 전권을 일임했다. 취임식에서 ‘물가를 때려잡고 저축을 늘릴 테니 6개월만 참고 기다려달라’고 했던 그의 약속대로 한국 경제는 백상이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던 기간 중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속성장 가도에 들어섰다. 경제기획원은 백상이 서울경제·한국일보 발행인으로 복귀한 1967년 10월까지 최강 경제부처로서 한국 경제의 고속질주를 이끌었다.

문화·스포츠 분야에서는 든든한 후원자요, 시대를 앞서 간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유엔이 정한 세계여성의 해인 1975년에는 공채로 여기자만 뽑았다.

백상과 함께 한국 경제는 승승장구했으나 유신 정부의 언론통제는 심각해졌다. 권력에 의해 쫓겨나는 기자들이 생겨났으나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만은 해직 기자가 없었다. 백상이 이들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정작 백상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했다. 남들의 네다섯 배나 열정적인 인생을 산 백상은 우리 나이 겨우 62세로 타계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의 경제·언론·정치·문화·스포츠는 또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을지 모를 일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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