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편향된 '退行외교'대신 국익 앞세운 '前向외교'로 [서울경제 창간 60년]

[창간기획]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하자 <상> 외교안보
G2 사이 '전략적 모호성' 한계 봉착...정책 궤도수정 시급
강한 국방·외교로 발언권 강화하고 우방과 동맹 확대해야
日과 갈등도 韓 입지 좁히는 걸림돌...미래지향적 해법 필요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전면전으로 치달으면서 한국 정부의 줄타기 외교도 중대 갈림길에 섰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 모두의 눈치를 보는 ‘전략적 모호성’이 점차 한계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국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현안별로라도 입장을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한국이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강한 국방, 유능한 외교력을 키워 발언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20세기 제국주의·냉전시대식 국제관계와 이념 중심 국제전략에서 탈피해 지금은 미래의 새로운 안보·경제위기에 대비한 전략적 우방·동맹관계 강화·확대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는 얘기다.

지난 2018년 무역전쟁으로 시작된 미중 갈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진원지 공방을 거쳐 홍콩 국가보안법, 남중국해 영유권 논란 등으로 이어지며 점입가경의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국이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라고 요구하자 중국이 쓰촨성 청두 주재 미국 총영사관 폐쇄로 반격하며 양국 간 갈등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은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미중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 노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일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기본 외교정책은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중국과의 관계도 조화롭게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이라며 해당 노선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이에 대해 세계질서 재편에서 소외되는 전략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이 사실상 시진핑 국가주석 장기 독재체제 채비를 갖춘 상황에서 미국 역시 트럼프 행정부가 연장되든, 조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 들어서든 중국에 대한 태도는 달라질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한국의 국가질서 원칙인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공정무역에 입각한 선택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조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정부가 선택의 순간에 자유무역·개방경제·인권 등 분명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면 큰 문제가 없다”며 “미국에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 현재보다 그 같은 원칙이 더 중요하게 먹힐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미국은 최근 동맹국에 반중 전선 참여를 강하게 요구하며 한국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 탈(脫)중국 경제동맹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 참여를 요구한 데 이어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호주·인도·러시아·브라질 등과 함께 한국을 초청했다. 21일에는 로버트 스트레이어 미 국무부 사이버·국제통신정보정책 담당 부차관보가 “LG유플러스 등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회사들은 ‘신뢰할 수 없는’ 공급업체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공급업체로 옮길 것을 촉구한다”며 공개적인 압박까지 했다. 7일부터 9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 역시 방한 과정에서 우리 정부에 ‘반중국 연합전선’ 참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중국 쪽 블록과 미국 쪽 블록 중 더 큰 쪽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이는 보나 마나”라면서 “우리는 법치를 따르는데 중국은 공산당이 법 위에 있는 나라이고 중국이 독자체제를 유지하게 되면 우리도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반대로 반중 전선에 동참한 국가에 보복조치를 취하며 공세에 나섰다. 중국은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을 제기해온 호주에 대해 육류 수입 일부를 중단한 데 이어 호주산 보리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화웨이는 버라이즌과 시스코·HP 등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며 반격에 나섰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도입으로 인한 ‘한한령(限韓令)’도 아직 풀리지 않은 한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움직임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나라들을 계속 접촉해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우리나라 스스로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며 “현 정부가 자주외교·조정자·중개자 등을 강조하며 이념적 이분법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면 악순환에 들어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차두현 수석연구위원은 “(한국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섰을 때) 중국 측의 보복과 압력이 있을 수 있지만 원칙을 천명하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며 “중국이 일본에 무역보복을 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미국과 중국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악화 일로를 걷는 한일관계는 한국의 국제적 입지를 더 좁히는 걸림돌로 지목됐다. 강제징용 판결과 일본 기업 자산 강제매각, 일본의 수출규제 지속 등 각종 갈등 현안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돌파해야 한다는 제언이 많았다. 일본 정부는 현재 한국에 대한 2차 보복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신각수 전 주일 한국대사는 “한일관계는 이해당사자가 많아 그것을 다 조정해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현 정부는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며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한일 양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본이 보급기지가 되고, 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자꾸 한일관계를 일본 식민지배에 따른 감정으로만 보고 현실로 보지 않는다”고 답답해했다. 김봉만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협력실장은 “전통적으로 일본은 한국의 주요 통상 파트너임에도 지금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코로나19 이후 강화될 보호무역주의를 한일이 함께 막아내는 역할을 하면 좋을 텐데 지금은 서로 ‘루즈 루즈’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윤경환·조양준·박효정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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