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해발 1,200m 장진호 입구에서 미 해병대가 진격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국방부
70년전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다 전사한 국군 참전용사들의 유해가 미국 하와이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얼마전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 달 29일 육군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6·25 전사자 봉환유해 합동안장식’을 거행했다. 합동안장식을 통해 장진호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 가운데 7위의 유해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초기인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장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미 1해병사단 등 유엔군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혈전을 벌였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됐다. 당시 매서운 추위가 찾아 들었던 장진호 일대에서의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철수작전으로 평가 받는다.
1950년 12월 흥남항에서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가기 위해 유엔군의 함정에 올라 있다. /사진제공=국사편찬위원회
당시 김일성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12만명에 이르는 중공군(중국군)에 포위돼 격전을 벌였다.
전쟁 초기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불리한 전세를 뒤집었다. 유엔군이 한반도 북쪽으로 진출하던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은 국경선으로 진출할 것을 명령했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로 진격했다.
이때 중공군은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12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장진호 일대에 편성했다. 중공군에 의해 11월 27일 장진호에 배치된 유엔군은 고립되고 말았다.
아군이 장진호 계곡에서 포위되자 맥아더 장군은 철수를 결정했고 알몬드 소장은 모든 부대에 함흥-흥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함경남도 장진군 유담리에 있던 유엔군은 미 공군의 지원으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철수과정에서 수많은 장병이 죽고 다치는 피해를 입었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역시 하갈우리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3,000여명의 장병 중 단 385명만이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고난의 후퇴 작전 끝에 하갈우리로 도착한 미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유엔군은 12월 7일 흥남으로 향했다.
지난해 9월 2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제4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식’에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 오른손을 잃은 헨리 셰이퍼(맨 앞 가운데)씨를 비롯한 참석용사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6.25전쟁 당시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를 치른 유엔군은 1만7,000여명의 사상자(실종자 포함)가 발행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10만여명의 피난민을 무사히 구출해낸 이른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했다. 미 제1해병사단과 유엔군이 막강한 공세를 펼치는 중공군에 맞서 싸우는 동안 적의 남하가 지연돼 이 때문에 흥남에서의 철수작전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은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많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 기념비적인 철수작전에서 10만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유엔군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 새롭게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수많은 피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력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영광스러운 후퇴작전으로 전쟁사에 기록돼 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