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엑스포의 랜드마크 한빛타워
1993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 대전 유성구 세계박람회장(EXPO). 엑스포 대종 타종과 함께 3군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곧 3개 출입구가 열리고 관람객들이 환성을 지르며 박람회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11월 7일까지 진행된 ’93 대전엑스포가 개막된 것이다. 첫날 관중은 대회조직위가 기대했던 50만 명보다 훨씬 적은 14만 명에 그쳤으나 대회기간 동안 관람객 1,400만 5,088명이 홀로그램과 자기부상열차 등 당시에는 ‘미래에서 온듯한 첨단과학’을 즐겼다.
고대 페르시아제국이 부를 과시하려 시작했다는 박람회가 정례적으로 시작된 것은 1850년 영국 런던 수정궁에서 열린 대박람회부터. 1844년 프랑스가 산업박람회를 열었으나 런던대회 이후 각국이 돌아가며 치르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개최국의 신기술과 문물, 산업생산력을 과시하는 만국박람회는 1936년 스톡홀롬 대회부터 두 종류로 나뉘었다.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다루는 등록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s)와 보다 제한되고 분명한 주제를 가진 인정 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s)로 구분한 것이다. 인정박람회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우리나라가 엑스포를 추진한 것은 1988년 무렵. 서울올림픽에 이어 새로운 업적을 찾던 노태우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었다. 언론도 일본 사례를 들어 선진국에 진입하는 통로라며 거들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이어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치르며 선진국 반열에 오른 일본을 따라가자는 것. 당초에는 1991년 사상 최대규모의 엑스포를 개최할 계획이었으나 과도한 예산이 든다는 이유로 범여권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국제박람회기구(BIE)도 마침 개최 비용이 과도하게 오른다는 이유로 1999년까지 대회를 유보했던 상태. 한국은 결국 올림픽에 준하는 유치단을 파견해 1991년 파리 총회에서 인정박람회 허가를 받아냈다.
총회 41개 회원국은 만장일치로 한국 개최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국에서 대규모 경협차관을 받은 소련이 공산권 회원국 설득에 나선 덕분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로 대전엑스포의 실상은 부풀려진 게 많다. 개발도상국 최초 개최라고 떠벌렸으나 아이티와 이스라엘, 헝가리, 불가리아 등은 한국보다 훨씬 앞서 엑스포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규모와 흥행으로 보면 동아시아 3국 중 한국의 성적이 가장 저조하다. 등록박람회를 치른 중국(2010년 상하이)과 일본(1970년 오사카)은 역대 박람회 관람객 1, 2위 기록을 갖고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