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거리로 나오자, 역사가 바뀌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
로런 엘킨 지음, 반비 펴냄
버지니아 울프·조르주 상드 등
女 예술인이 걸었던 거리 누비며
잊혀진 지성사·문화사 끄집어내
도시가 여성에 어떤 기쁨 주는지
걷기 행위의 의미 변화도 알려줘

‘도시를 걷는 여자들’ 자료사진

19세기만 해도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숙함에 대한 평판에는 금이 갔다. 상류층 여성은 공원 산책을 하더라도 ‘샤프롱’이라 불리는 보호자를 대동해야 했고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 숲을 돌아다녀야 했다. 지붕 덮인 마차에 탄 여성은 D.H.로렌스가 쓴 ‘마담 보바리’의 그 유명한 밀애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의혹의 대상”이 됐다.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는 성폭력 유발자나 성매매 여성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저자 로런 엘킨은 일찍이 도시를 거닐기 시작해 역사를 전복하고 새로움을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의 ‘거리’를 따라 나섰다. 뉴욕, 파리, 런던, 베네치아, 도쿄 등을 누비며 잊히거나 외면당한 여성의 지성사와 문화사를 정중하게 끄집어낸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와 도시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거리 산보를 ‘거리 배회(street hunting)’라 불렀다. 그가 쓴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방 밖으로 나갔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25년의 일기에서 울프는 “초여름 런던의 삶을 좋아”하며 “거리를 어슬렁 돌아다니고 스퀘어를 들락날락” 했으며, 1930년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걸으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았을 때도 “혼자 런던을 걷는 게 최고의 휴식”이라고 했다. 그는 단순히 거리 구경을 즐긴 게 아니다. ‘시선의 대상’이 아닌 ‘관찰하는 주체’가 되는 익명성을 누리고 즐겼다. 자신의 소설 ‘세월’에서 울프는 주인공 페기의 1918년 폭격에 대한 기억을 빌려 “거리 모퉁이에 걸린 프래카드마다 죽음이 있었다. 아니 더 심하게, 독재, 야만, 고문, 문명의 몰락, 자유의 끝이 있었다”고 적었고 1940년에는 런던 타비스톡스퀘어를 걸으며 폭격으로 껍데기만 남은 집을 향해 “지하실이 전부 폐허다. 오래된 버들가지 의자, ‘임대’라고 쓴 현판, 그 밖에는 벽돌과 나무 조각뿐이다. 옆집 유리문 하나는 아직 달려 있다. 내 작업실 벽 일부가 서 있는게 보인다. 그 방에서 내 책 전부를 썼는데 남은 것이라고는 그것뿐이다”라고 썼다. 1941년 2월의 일기에서는 산책을 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 됐음을 한탄하며 “나에게 강렬한 기쁨을 주었던 그 문장들을 내가 다시 쓸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다. 그가 자살하기 한 달 전의 일이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 자료사진

조르주 상드는 남장한 채 돌아다니고 수많은 애인을 거느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832년 6월 파리에서 일어난 민중봉기가 거리를 피로 물들이고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음에 염증을 품고 파리를 떠난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현대미술가 소피 칼은 남성적 행위였던 ‘추적’이 여성의 것이 됐을 때 어떤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지 실험했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에게서는 여성이 카메라 뒤에 설 때 시선의 의미가 어떻게 전복되는지를 읽어냈다. 미국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저술가인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왜 여자들은 나와서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책의 원제는 프랑스어 ‘플라뇌즈(Flaneuse)’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걷다’를 의미하는 동사 플라네르(flaner)의 파생어로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플라뇌르(flaneur라는 단어가 더 익숙할 것이다. 장 자크 루소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예찬하고, 샤를 보들레르가 “도시를 경험하기 위해 도시를 걸어다니는 자”라 했던 플라뇌르는 19세기 문화사를 논할 때 예술가 영감의 원천으로 빠짐없이 등장했다. 플라뇌르는 남성형 명사다. 아주 최근까지도 ‘여성 플라뇌르’ 즉, ‘플라뇌즈’는 없는 개념이었다. “19세기의 성별 분화 때문에 그런 인물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간주”됐고 “도시의 관찰자는 오직 남성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책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걷기가 남성적 특권과 여유였던 것에 대한 경험적 반발이요, 논리적 반박이다.


남 일이기만 한가. 플라뇌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우리말의 ‘한량’은 주로 남성에게 쓰였고, ‘기생’은 여성이었다. 무형문화재로도 지정된 ‘한량춤’은 남성춤이었고, 불과 몇 년 전 인권위원회 권고를 받고서야 여성 전수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옛일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강남역에서, 서울역에서 여성이 당한 ‘묻지마 폭행 사건’은 최근의 뉴스다. 책을 들고 저자를 좇는 동안 도시는 여성들에게 어떤 자유와 기쁨을 안겨주는지, 여성이 거리로 나왔을 때 걷기라는 행위의 의미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게 된다. 누가, 왜, 무엇이 두려워 여성이 도시 걷는 일을 방해하는가. 1만9,000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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