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가 미국의 화웨이 제재 강화에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시장에서 화웨이의 점유율 하락과 삼성전자의 점유율 반등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화웨이가 삼성전자의 5대 매출처 중 하나라는 이유로 양사간의 관계가 ‘프레너미(Frenemy·Friend+Enemy)’라는 분석을 내놓지만 실상은 스마트폰·통신장비 시장에서 격돌하고 있는 ‘에너미’에 가깝다. 올 2·4분기 화웨이에 스마트폰 점유율 1위 자리를 내준 삼성전자는 이번 미국 제재로 스마트폰 1위 자리 회복은 물론 5G·6G 통신 장비 시장에서도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됐다.
화웨이는 삼성의 '프레너미'가 아닌 '에너미' |
실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KLA, 램리서치,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등 미국 반도체 업체의 장비를 사용하고 있어 미국 제재에 동참해야 한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D램 생산라인에 EUV(극자외선) 장비를 독점 공급중인 네덜란드 ASML 또한, 미국업체 싸이머를 인수해 해당 기술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 방침을 따라야 한다.
이 같은 화웨이 제재는 단순 재무제표상 삼성전자에 손해로 보인다.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화웨이는 올 2·4분기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5,580만대의 제품을 판매해 삼성전자(5,420만대)를 뛰어넘었다. 스마트폰에는 중앙처리장치(CPU)의 연산을 도와주는 D램과 각종 데이터를 저장하는 낸드플래시가 필수 탑재되는 만큼, 화웨이의 스마트폰 판매량 증가는 삼성전자 DS 사업부 매출 증대로 이어진다.
문제는 화웨이의 점유율이 삼성전자가 차지해야 할 몫을 상당부분 앗아갔다 데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는 지난 2014년 차이나모바일·차이나텔레콤·차이나유니콤 등 중국 주요 이통사를 대상으로 휴대전화 보조금 감축을 강제해, 고가폰 위주였던 삼성전자를 중국 현지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시켰다. 이 때문에 지난 2013년만 하더라도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20%로 1위를 차지했던 삼성전자는, 이후 점유율이 0%대까지 내려앉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중국 현지 스마트폰 생산라인을 완전 철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D램
반면 중국 정부는 이후 화웨이·비보·오포·샤오미 등 자국 스마트폰 업체를 육성해 글로벌 브랜드로 키웠다. 이들 제품은 자국 정부의 보조금을 바탕으로 한 높은 가격 경쟁력으로 유럽·동남아·남미 등 주요 시장을 파고 들었다. 일각에서는 이들 중국업체의 빠른 성장 배경으로 삼성전자 등 주요 업체의 기술 특허를 무단 도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특히 화웨이는 미국 제재에 반발한 자국 국민들의 ‘애국 소비’ 덕분에 스마트폰 판매량이 급증하며 올 2·4분기 사상 첫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이번 미국의 화웨이 제재로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1위 복귀는 물론 수익률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전망이다. 화웨이는 TSMC 파운드리 설비 이용 제한으로 자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린’ 생산을 다음달부터 중단하는 등 제품 경쟁력 급하락이 예상된다. 중국 스마트폰 업체 중 7나노급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설계 역량을 보유한 업체는 화웨이가 유일하기 때문에, 여타 중국 스마트폰 업체는 하이엔드급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하기 힘들다. 이번 제재로 화웨이가 대안으로 여겼던 대만 미디어텍의 AP 수급도 불가능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반면 삼성전자는 ‘갤럭시A’ 등 중저가 스마트폰 라인업이 확실한 데다 ‘갤럭시노트20’이나 ‘갤럭시폴드’ 등 하이엔드 제품에서는 압도적인 역량을 자랑하는 만큼 화웨이의 시장 점유율을 상당부분 앗아올 수 있을 전망이다. 중국과 인도 간 국경 분쟁에 따른 ‘반 중국’ 시위로 인도 현지 시장에서 삼성전자 스마트폰이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점도 호재다. 삼성전자 DS 사업부 또한 화웨이에 공급하던 D램과 낸드플래시를 삼성전자 IM 사업부나 여타 중국 스마트폰 업체에 공급하면 돼,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전망이다.
통신장비 시장도 삼성에 기회 |
다만 이번 미국 제재로 화웨이 통신장비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 수급에 차질이 불가피한 만큼 5G 시장에서 화웨이의 점유율은 대폭 줄어들 전망이다. 중국 정부가 육성중인 현지 1위 파운드리인 SMIC를 통해 칩을 조달할 수 있지만, SMIC가 보유한 최상위 공정은 14나노에 불과하다. 반면 삼성전자·TSMC 등 선두권 파운드리 업체의 기술력은 5나노를 넘어 4나노를 향해가고 있다.
이재용(앞줄 가운데)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월 화성에 자리한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를 방문해 “미래 기술을 얼마나 빨리 우리 것으로 만드느냐에 생존이 달려 있다”며 초격차를 당부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삼성전자는 지난달 주요 통신기기 사업자 중 최초로 차세대 통신 기술인 ‘6G 백서’를 공개하는 등 통신장비 시장 개척에 가장 적극적이란 평을 받고 있다. 주요 경쟁사인 노키아의 통신장비 기술이 삼성전자나 에릭슨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만큼 삼성전자가 에릭슨만 잘 견제한다면 차세대 통신 시장에서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을 전망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자율주행·인공지능 등의 핵심 인프라가 되는 통신장비 분야에 관심이 큰 것으로 전해진 만큼 추가적인 투자 확대도 기대된다. 화웨이가 없더라도 삼성전자 DS 사업부의 통신장비용 메모리 반도체 매출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란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다만 조만간 방한 예정인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이 ‘화웨이 살리기’를 위한 중국 정부 차원의 메시지를 내놓을 경우 삼성전자가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 있다. 중국은 미국 제재 대응 차원에서 칭화유니그룹 등을 육성중이지만, 화웨이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대만이나 한국이 생산을 담당하고, 자국 업체가 설계를 주도하는 반도체 산업구조를 중국이 깨트리려 하는 데 상당한 경계심을 품고 있으며 이번 화웨이 제재도 이 같은 불안 때문”이라며 “다만 배터리나 디스플레이 등 눈에 띄는 미국 업체가 없는 분야는 결국 ‘차이나 굴기’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반도체 이외 부분에서 한국의 산업 경쟁력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밝혔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