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가 지난 14일 시장님 지시사항이라며 직원들에게 내린 공문. /자료제공=독자 제보
오는 21일 전공의 무기한 파업의 예고된 가운데 국민권익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관련 설문조사가 의사 집단과 호남 등 지방자치단체 집단의 여론몰이 장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권익위는 오는 25일까지 설문조사를 토대로 나름 여론 수렴을 하겠다는 취지인데 지금처럼 통계가 왜곡될 바에는 그 결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는 것이다.
19일 관가와 의료업계에 따르면 권익위가 현재 진행 중인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설문조사에는 해당 사안과 관련한 이해 관계자들이 주변인까지 동원해 대거 유입되고 있다. 실제로 서울경제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전북 남원시청은 ‘시장님 지시사항’이라는 제목으로 직원들에게 “필히 권익위 설문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19일까지 회신하라”는 공문까지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에는 남원시 공무원뿐 아니라 청원 경찰까지 포함됐다. 전북 남원은 의대 정원 확대 시 2018년 문을 닫은 서남대 의대 정원을 활용해 국립공공의료대학원이 개교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설문조사 댓글에는 “공문으로 공무원들 가족들 설문조사 찬성하라고 강요하고 명단까지 돌리는 나라가 우리나라 맞느냐” “정부 주도 여론조작”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기도 했다.
전북 남원시가 권익위 설문과 관련해 직원들에게 알린 홍보 게시글. /자료 제공=독자 제보
전남 목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목포시청은 “30여년 간 우리 지역민의 숙원사업인 목포대 의대 유치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며 내부망에 청와대 국민청원 인터넷 주소를 지인에게도 홍보하라는 글을 올렸다. 공공의대 유치에는 남원 외에도 전남 목포와 순천, 경북 포항과 안동 등이 의지를 보이는 중이다.
권익위 설문에 집단 대응에 나선 건 비단 지자체뿐이 아니다. 이와 반대 의견을 가진 의료인 집단도 해당 설문에 애초부터 적극 대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19일 오전 현재 3만 명 이상 참여한 설문에 의사 집단 의견에 찬성하는 입장이 70~80%에 달할 정도다. 이름만 ‘대국민 설문’일 뿐 사실상 이해관계 집단의 세 대결 양상이 된 셈이다. 실제로 설문 댓글 중에는 “이런 설문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지인에게 링크를 받아 들어왔다”는 내용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전남 목포시청이 내부망에서 의대 정원 관련 직원들에게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를 독려하는 내용의 게시글. /자료제공=독자 제보
남원시청 관계자는 서울경제 취재진과의 전화통화에서 “설문 초기 90%가 의사협회 의견에 동조하는 상황에 상식적으로 국민 뜻이 반영된 게 맞는지 의문을 가졌고 시 입장에서도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며 “갈등을 조장하는 이 같은 설문은 의미도 없고 우리 입장에서도 억울하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했다는 한 20대 의사는 “의사협회가 설문조사를 독려하는 것과 시에서 공문 보내는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느냐”며 “남원시 공문 얘기를 의사들 단체 채팅방에서 듣고 설문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남원시청이 내부망에서 권익위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올린 게시글. 이 글은 현재 더 간략하게 수정된 상태다. /사진제공=독자 제보
권익위는 지난 12일부터 오는 25일까지 2주간 국민정책참여 플랫폼인 ‘국민생각함’에서 해당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중이다. 해당 설문은 ‘귀하께서는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귀하께서는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해 의사 수를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귀하께서는,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을 강행할 경우, 파업이 불가피하다는 의사협회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등으로 구성됐다.
권익위는 지난 6월29일 전현희 위원장 취임 이후 ‘현안 대응’을 이유로 국민생각함을 통해 각종 설문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부동산대책과 관련한 국민 의견을 이미 발표했고 이달 10일부터는 ‘대학등록금 반환’ 관련 설문조사도 진행하고 있다.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연합뉴스
하지만 권익위의 설문조사는 민간 여론조사와 달리 표본 보정 등 통계적 작업을 전혀 거치지 않아 민의가 왜곡될 소지가 크다는 비판도 곳곳에서 제기된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성명서를 내고 “고충 민원 처리와 행정제도 개선을 통해 국민 권리를 보호하는 권익위가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며 “(권익위 설문조사 질문은) 의료계 단체행동의 이유를 피상적으로 단정했다”고 비판했다.
전현희 위원장은 의대 정원 관련 설문을 실시하면서 “우리 사회 발전과정에서 불가피한 갈등을 건설적으로 이끌어 갈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며 “국민권익위는 심각한 사회 갈등이 예상되는 사안에서 국민 의견을 수렴하여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갈등 조정의 중추적 역할을 해 나가겠다”고 주장했다.
/윤경환·박효정기자 ykh22@sedaily.com
권익위가 국민생각함 홈페이지에 게시한 ‘의대 정원 확대’ 관련 주요 주장 비교. /자료제공=권익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