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타일러 라쉬./오승현기자
미국 출신의 방송인 타일러 라쉬가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기후위기 문제에 관한 책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외국인’ ‘시카고대·서울대 출신 뇌섹남’ ‘8개 국어가 가능한 언어 천재’ 등의 수식어로 잘 알려진 라쉬인 만큼 당연히 한국에 대한 이야기나 공부법을 다룬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쉬는 책 ‘두 번째 지구는 없다’에서 그간 ‘TV 방송에서 재미없다는 이유로 편집되거나 빨리 감기로 풍자의 대상’이 됐던, 하지만 그가 이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최근 서울 마포구 북티크에서 만난 그는 “2014년 방송활동을 시작한 후 책을 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제가 꼭 원하는 조건이 있었다”며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책을 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출간하게 됐고,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더 뜻깊다”고 말했다.
그가 고집해온 조건이란 책이 ‘환경친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이는 산림자원과 환경 보호를 위해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에서 인증받은 것을 쓰고, 콩기름 잉크로 인쇄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에 돌아온 대답은 ‘전례가 없다’ ‘불가능하다’였다. 그는 “한국 인쇄소들도 FSC 인증 방식으로 책을 찍을 수 있었지만 모두 수출용에 국한됐다”며 “해외 소비자는 요구하니까 그렇게 만들어 보내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드디어 지난 7월 그 조건에 맞춘 ‘두 번째 지구는 없다’가 세상에 나왔다. 국내 종합 출판사가 FSC 인증 방식으로 펴낸 첫 대중서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불필요한 종이 낭비를 막기 위해 띠지를 생략하고 종이 손실이 적은 판형을 선택했다.
라쉬는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통해 꼭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으로도 FSC 인증을 꼽았다. 그는 “책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책 전체가 이렇게 환경 보호를 하는 방식으로 나온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며 “독자들이 책을 통해 FSC 인증에 대해 더 잘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그는 “두유 팩이나 기저귀 등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FSC 인증을 받은 종이들을 활용한 경우가 많다”며 “독자들이 앞으로는 FSC 인증을 받은 종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가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 속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다. 미국 버몬트주의 숲속 작은 마을에 살았던 그는 어린 시절 바위를 기어 올라가고, 개구리를 잡으며 지냈다. 하지만 시카고와 서울 등 대도시에서 살면서 라쉬 본인도 우리가 자연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는 사이 지구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는 책 서문에서 집필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밝혔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환경을 이야기하는 건, 누구라도 당장 말을 꺼내고 너나없이 당장 행동해야 할 만큼 지구의 상황이 절박해서이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목소리를 내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마음으로 작은 용기를 낸다.”
방송인 타일러 라쉬./오승현기자
환경에 대한 책을 출간한다고 하자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거다’ ‘누가 관심을 가질 거 같으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방송활동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라쉬가 썼다는 점과 최근 환경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높아진 상황에 힘입어 책은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사회과학서적으로 분류돼 7월 출간된 ‘두 번째 지구는 없다’는 벌써 4쇄를 찍었고, 지금까지 1만1,000여권이 팔렸다. 그는 “환경 문제에 대한 입문서 격인 제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은 환경 관련 서적을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권한다. 그가 추천하는 환경 도서는 자신의 책에서도 언급한 마크 라이너스의 ‘6도의 멸종’ 등이다. 라쉬는 “기후위기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주제”라면서도 “한국이 사실상 선진국이고 세계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에 한국이 환경 분야에서도 충분히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너무 어렵지 않게,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게 쓰인 것이다. 책을 쓸 때 가장 신경 썼던 부분도 이 점이었다. 그는 “지구 환경 생태계는 매우 복잡한 만큼 화학·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들을 모두 다뤄야 한다”며 “하지만 설명을 길게 하면 어려워지고, 그렇다고 생략하면 너무 단순해지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책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 세계자연기금(WWF) 한국본부 해양보전팀장인 이영란 건국대 수의학과 겸임 교수의 자문을 통해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는 “자문을 통해 꼭 들어가야 하는 부분과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명확해져 책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교수의 자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WWF와 그의 남다른 인연 때문이다. 그는 2016년부터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매월 기부하며 WWF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홍보대사로서 그는 WWF에서 나온 환경 관련 내용을 라디오나 방송 등 자리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려고 노력하며, WWF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후 문제와 책 집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고 유창하게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리게 되지만 그는 엄연한 미국인이다. 올해는 그가 첫 책을 낸 해이면서 한국에 온 지 10년 차를 맞은 해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시카고대를 졸업한 후 서울대에서 외교학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2011년 한국에 왔다. 2014년부터 JTBC ‘비정상회담’으로 방송활동을 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한국 생활을 통해 제 인생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방송인 타일러 라쉬(Tyler Rasch)./오승현기자
“원래 제가 미국에서만 살았으면 미국적인 것만 알고 미국이라는 틀 안에서만 살았을 텐데, 한국 생활을 하면서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한 나라에 갇힐 필요 없이, 지구 전체가 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미국에 있을 때는 유럽에서 대학원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최근에는 ‘노르웨이에서 기후과학 대학원을 다녀볼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됐어요.”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매력으로 잠재력을 꼽았다. 라쉬는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취미나 재능을 남에게 잘 안 보여주려 하는데, 한국도 그런 것 같다”면서 “한국이 갖고 있지만 보여주지 않은 잠재력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점점 발전할 모습이 기대된다”고 했다.
쉼없는 에너지와 아이디어로 강연과 방송활동, 한국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컨설팅 회사 대표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던 그는 요즘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요즘은 개인적으로 애매한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제가 그동안 해온 활동들을 검토하고 다음 단계를 생각해보는 시기로 삼고 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에서 알 수 있듯, 먼 훗날에는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꿈꾸고 있기는 해요.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사회생활에 지쳐서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안식처를 어디에 만들면 좋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타일러는 그냥 타일러에요”
“타일러는 그냥 타일러예요.”
방송인이자 강연자, 그리고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컨설팅 회사의 대표, 최근에는 여기에 작가라는 직함까지 더해졌다. 아이디어도 많고 다재다능한 타일러 라쉬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어떤 수식어가 가장 마음에 들고, 어떤 수식어로 오래 기억에 남고 싶으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식어 대신에 그냥 제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한국은 수식어나 직함에 집중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논어를 보면 ‘스스로의 한계를 긋지 말라’라는 말이 있어요. 자기소개를 할 때 ‘어디에서 온 어떤 직함의 누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그렇게 한정 짓고 틀 안에 가두는 것과 같죠.”
그는 한국 사람들이 ‘타일러 라쉬는 이런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기억해주기보다는 활동을 중단하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잊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예전에 한 방송에서 ‘본인이 죽은 후 묘비에 뭐라고 쓰여 있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써 있지 않고 비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며 “같은 맥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자신을 오래 기억해주시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한 활동들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 영향력을 전한 것으로 됐다”고 부연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고,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를 묻는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질문에 그는 그답게 자신만의 생각을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방송활동을 즐기지 않거나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다. 한국 생활과 방송활동을 통해 그는 얻은 것이 많다. 그는 “방송은 굉장히 즐겁게 했다”며 “제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거나 웃긴 개그맨이 아닌 그냥 ‘타일러 라쉬’였기 때문에 대중이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시는 것 같아서 굉장히 편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길에서 저를 보면 많이들 반가워해주시는데 마치 수업을 같이 들은 학우처럼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면서 “방송을 통해 한국 분들과 그런 관계가 형성돼 정말 좋다”며 웃었다.
/김현진기자 star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