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인근 해역에서 펼쳐진 악티움 해전도. 로마 권력의 향방은 물론 세계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위키피디아
기원전(BC) 31년 9월2일 악티움(오늘날 그리스 서북부 프레베자) 앞바다. 육지와 바다의 전선에서 8개월 넘게 대치하던 옥타비아누스(당시 32세)와 안토니우스(52세)·클레오파트라(38세) 연합의 함대가 맞붙었다. 당초 전망은 연합 측의 우세. 전함 탑승 보병이 2만여명으로 옥타비아누스군의 1만6,000여명보다 많았다. 대형 갤리선은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며 병사들의 숙련도 역시 높았다. 연안이지만 높은 파도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 벌어진 해전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으나 오후 들어 연합 측에 이상 상황이 생겼다.
후위를 맡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전함 60척이 갑작스레 전선을 이탈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봉쇄를 정면돌파했으나 뒤돌아 포위하지 않고 그대로 전선을 빠져나갔다. 안토니우스도 클레오파트라를 뒤쫓았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조언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병력을 재정비하면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착오였다. 지휘관이 도망쳤다고 생각한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어두워질 무렵, 전투는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부하이자 동갑내기 친구인 아그리파의 분전으로 승리를 거머쥔 옥타비아누스는 밤새도록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피아를 떠나 바다에 빠진 ‘로마 병사’들을 구조하기 위해서다.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대로 악티움 해전의 승리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과장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지휘관이 보여준 상반된 행태는 개인 간의 권력 투쟁은 물론 로마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알렉산드리아로 후퇴해 최후의 일전을 벼르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듬해 자살로 생을 마쳤다. 공화정으로 시작해 두 차례 삼두과두정을 지나온 로마는 사실상의 황제정에 들어섰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전술적 승리 요인은 크게 세 가지가 손꼽힌다. 첫째, 퀸투스 델리우스의 투항. 안토니우스의 장군이었으나 전투 직전에 항복한 퀸투스를 통해 고급 정보를 얻었다. 둘째는 전염병. 안토니우스 진영에 괴질이 발생해 선원의 절반이 앓았다. 셋째는 아그리파의 식량 보급 차단. 악티움 해전 이전부터 수차례 육상전투로 식량 보급로부터 끊었다. 안토니우스군은 싸우기 전부터 굶주림과 전염병이라는 이중고를 겪었다.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산 밀로 뽑아낸 빵을 무상으로 뿌렸다.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무려 41년간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한 그가 시행하고 제시한 세제와 행정, 문화 지원과 사회적 도덕률은 오늘날까지 서구문물의 기본으로 남아 있다. 세상은 아직도 ‘악티움’의 영향권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