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로 승격 예고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사진제공=문화재청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애쓰던 왕건이 경북 고령의 미숭산에서 백제의 왕손인 월광 왕자와 맞서게 됐다. 왕건의 위기를 전해 듣고 단숨에 달려가 도운 사람이 경남 합천 해인사의 희랑대사다. 고려 건국 당시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희랑대사는 북악파의 종주였고 왕건의 정신적 스승이 됐다. 희랑대사의 생존시기는 불분명하나 신라 말에 태어나 고려 초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고,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이었다고 전한다. 왕건은 희랑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이 고려 시대 승려 희랑대사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보물 제999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을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2일 밝혔다. 고려 시대인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이라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이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돼 온 것으로 확인되며, 이덕무(1741~1793)의‘가야산기’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도 남아 있다. 이처럼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祖師像)도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다.
희랑대사의 별명은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흉혈국인(胸穴國人)’이었다.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피를 보시했다는 해인사의 설화가 전한다. 이처럼 가슴이나 정수리에 구멍이 있는 승려 형상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실제 ‘건칠희랑대사좌상’에도 폭 0.5cm, 길이 3.5cm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제작에 사용된 건칠(乾漆)은 삼베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 형상을 만든 기법이다. 지정조사 과정에서 이뤄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의 과학 조사 결과, 이 작품은 얼굴·가슴·손·무릎 등 앞면은 건칠로 만들어 졌다.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들었는데 원형이 잘 간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변형 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담당자는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했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며 역사·예술·학술 가치가 탁월하다”며 지정 이유를 설명했다.
이 유물은 고려 1,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8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대고려’ 전시를 위해 해인사를 떠나 ‘천 년 만의 외출’로 주목받기도 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