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출신의 방송인 타일러 라쉬가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기후위기 문제에 관한 책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외국인’ ‘시카고대·서울대 출신 뇌섹남’ ‘8개 국어가 가능한 언어 천재’ 등의 수식어로 잘 알려진 라쉬인 만큼 당연히 한국에 대한 이야기나 공부법을 다룬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라쉬는 책 ‘두 번째 지구는 없다’에서 그간 ‘TV 방송에서 재미없다는 이유로 편집되거나 빨리 감기로 풍자의 대상’이 됐던, 하지만 그가 이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라이프점프는 라쉬의 속사정을 듣기 위해 그를 서울 마포구 북티크에서 만났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2014년 방송활동을 시작한 후 책을 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많이 받았지만 제가 꼭 원하는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책을 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출간하게 됐고,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았기 때문에 더 뜻깊다.”
-무슨 조건이지?
“환경친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종이는 산림자원과 환경 보호를 위해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에서 인증받은 것을 쓰고, 콩기름 잉크로 인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돌아온 대답은 ‘전례가 없다’, ‘불가능하다’였다.
한국 인쇄소들도 FSC 인증 방식으로 책을 찍을 수 있었지만 모두 수출용에 국한됐다. 해외 소비자는 요구하니까 그렇게 만들어 보내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다.
이런 과정 끝에 이 책이 세상에 나왔다. 국내 종합 출판사가 FSC 인증 방식으로 펴낸 첫 대중서다. 이 책은 불필요한 종이 낭비를 막기 위해 띠지를 생략하고 종이 손실이 적은 판형을 선택했다."
-FSC 인증을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을까.
“책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책 전체가 이렇게 환경 보호를 하는 방식으로 나온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책을 통해 FSC 인증에 대해 더 잘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두유 팩이나 기저귀 등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FSC 인증을 받은 종이들을 활용한 경우가 많은데 독자들이 앞으로는 FSC 인증을 받은 종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언제부터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자연 속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다. 나는 미국 버몬트주의 숲속 작은 마을에 살았다. 어린 시절 바위를 기어 올라가고, 개구리를 잡으며 지냈다. 하지만 시카고와 서울 등 대도시에서 살면서 우리가 자연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잊고 지냈다. 그러는 사이 지구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책 서문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환경을 이야기하는 건, 누구라도 당장 말을 꺼내고 너나없이 당장 행동해야 할 만큼 지구의 상황이 절박해서이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목소리를 내지 못할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마음으로 작은 용기를 낸다’고.”
-환경이 서점에서 잘 팔리는 이슈가 아닌데.
“환경에 대한 책을 출간한다고 하자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거다’ ‘누가 관심을 가질 거 같으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기대보다 초반 반응이 좋다. 이 책은 사회과학서적으로 분류됐는데 7월 출간된 ‘두 번째 지구는 없다’는 벌써 4쇄를 찍었고, 지금까지 1만1,000여권이 팔렸다. 환경 문제에 대한 입문서 격인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은 환경 관련 서적을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다."
-책에서 마크 라이너스의 ‘6도의 멸종’을 추천했는데.
“기후위기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주제다. 한국이 사실상 선진국이고 세계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에 한국이 환경 분야에서도 충분히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어렵지 않게, 그러면서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게 썼다.
“책을 쓸 때 가장 신경 썼던 부분도 이 점이었다. 지구 환경 생태계는 매우 복잡한 만큼 화학·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들을 모두 다뤄야 한다.
하지만 설명을 길게 하면 어려워지고, 그렇다고 생략하면 너무 단순해지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책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 다행히 세계자연기금(WWF) 한국본부 해양보전팀장인 이영란 건국대 수의학과 겸임 교수의 자문을 통해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자문을 통해 꼭 들어가야 하는 부분과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 명확해져 책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영란 교수하고는 어떻게 인연을 맺은 건가.
“남다른 인연이 있다. 2016년부터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매월 기부하며 WWF 홍보대사를 맡아오고 있다. 홍보대사로서 WWF에서 나온 환경 관련 내용을 라디오나 방송 등 자리가 있을 때마다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WWF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화제를 돌려보자. 한국에 온 지 10년이 됐다. 그간 한국생활은 어땠나. 소회를 말해달라.
“한국 생활을 통해 제 인생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미국에서만 살았으면 미국적인 것만 알고 미국이라는 틀 안에서만 살았을 텐데, 한국 생활을 하면서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나라에 갇힐 필요 없이, 지구 전체가 내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미국에 있을 때는 유럽에서 대학원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최근에는 ‘노르웨이에서 기후과학 대학원을 다녀볼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됐다.”
-한국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잠재력이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취미나 재능을 남에게 잘 안 보여주려 하는데, (국가로서) 한국도 그런 것 같다. 한국이 갖고 있지만 보여주지 않은 잠재력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점점 발전할 모습이 기대된다.”
-집필활동 외에 최근엔 무엇을 하고 지내나.
“요즘은 개인적으로 애매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해온 활동들을 검토하고 다음 단계를 생각해보는 시기로 삼고 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고 있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에서 알 수 있듯, 먼 훗날에는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꿈꾸고 있기도 하다.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사회생활에 지쳐서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안식처를 어디에 만들면 좋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다.”
-방송인, 강연자, 컨설팅 회사 대표, 최근에는 여기에 작가라는 직함까지. 당신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은데. 어떤 수식어로 오래 기억에 남고 싶은가.
“수식어 대신에 그냥 내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다. 한국은 수식어나 직함에 집중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논어를 보면 ‘스스로의 한계를 긋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어디에서 온 어떤 직함의 누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그렇게 한정 짓고 틀 안에 가두는 것과 같다. ‘타일러 라쉬는 이런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기억해주기보다는 활동을 중단하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잊어줬으면 좋겠다.
예전에 한 방송에서 ‘본인이 죽은 후 묘비에 뭐라고 쓰여 있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써 있지 않고 비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같은 맥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자신을 오래 기억해주시기보다는 제가 그동안 한 활동들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다면 그 영향력을 전한 것으로 됐다.“
/김현진 기자 stari@sedaily.com